[사색의 향기] 추억 속의 라오스

입력
2015.04.26 13:22

사람이 변하듯 장소도 변한다. 세월이 강제하는 그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지난 주 라오스에 다녀왔다. 12년 만에 다시 찾아간 길이었다. 내 추억 속의 라오스와 현재의 라오스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오스는 그 사이 ‘핫’한 여행지가 되어 몹시 번잡해졌고, 물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었다. 무엇보다 라오스의 자산이었던 사람들의 미소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시간이 멈춘 땅’이란 라오스의 이름표는 우리나라 여행사의 광고처럼 ‘다이나믹 라오스’로 변한 듯 했다.

특히 인구 3만의 작은 마을 방비엥의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방비엥의 거리를 오가는 외국인의 절반이 한국인이었다. 거리 곳곳에 한글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한국 민박과 한국식당, 심지어 한국 슈퍼까지 있었다. 텔레비전의 인기 프로 “꽃보다…” 시리즈에서 라오스 편을 방영한 후부터 한국인이 그야말로 물밀듯 밀려온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방비엥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카르스트 지형의 산과 석회암 동굴, 맑은 강이 흐르는 자연, 세상과 동떨어진 듯 느긋한 마을 분위기에 반해 찾아오던 곳이다. 카약을 타고 강을 내려오다 보면 뗏목에 맥주를 실은 여자들이 “비어 라오(Beer Lao)”를 외치며 지나갔다. 동굴을 탐험한다며 어두운 동굴 속을 돌아다니다 밤이 오면 갈 곳도 없어 일찍 잠자리에 들던 곳이었다. 욕망을 내려놓고, 시계를 풀어놓고, 자연 속에서 어슬렁거리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랬던 방비엥이 2000년대 후반에 환락적인 여행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태국의 코팡안과 더불어 아시아 최고의 파티 여행지로 세계의 배낭족을 끌어들였다. 강변에 무허가 술집이 마구 생겨났다. 약과 술을 섞은 강력한 칵테일에 취한 젊은이들이 튜빙이나 짚라인을 하다가 해마다 20~30명씩 목숨을 잃었다. 결국 2012년 가을 문화관광부 장관의 지시로 무허가 술집과 불법 놀이기구들이 철거되면서 불행한 시대는 끝이 났다. 방비엥이 고즈넉한 옛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할 무렵, 한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라오스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의 여행 방식은 닮아있었다. “이거 칠봉이가 맛있다고 했던 건데 먹어보자.” “꽃청춘들이 머물렀던 숙소에서 자고 싶은데….” “걔들이 점프한 블루라군은 가봐야지.” 실제로 라오스에서 내 귀에 들려왔던 대화들이다.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자기만의 라오스를 찾기보다는 ‘꽃보다’의 라오스를 소비하기에 바빠 보였다.

그 집단적인 소비 행위에 타인을 위한 배려가 생겨나기는 힘들다. 루앙프라방의 명물은 새벽 탁발이다. 맨발의 스님들이 침묵 속에서 하루의 수행에 필요한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 새벽. 탁발을 보러 나갈 때마다 스님들을 배경으로 떠들며 셀카를 찍는 한국인들과 마주쳤다. 그 고요한 새벽에 큰 소리로 들려오는 언어는 한국어와 중국어뿐이었다. 여행은 내 돈 내가 쓰는 소비 행위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행위기에 안타까웠다.

라오스에 머무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는 ‘꽃보다’라는 프로그램과 내가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내가 책을 통해 소개한 어떤 여행지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나를 설레게 했던 것들이 그 발길에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꽃보다 청춘 유감이야”라고만 할 수가 없었다. 라오스도, 여행자들도, 내가 하는 일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 푸념에 지인이 이런 글을 보내왔다. 생명을 지닌 유기체처럼 어떤 장소들도 매 순간 변해간다고, 지나가는 이방인인 나는 끝없이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찰나의 순간을 들여다볼 뿐이라고. 결국 그 장소는 세월의 힘에 기대어 다시 자신을 정화해낼 거라고.

그제야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떤 장소가 드러내는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행을 사랑하는 이의 가장 큰 미덕은 여행하는 장소와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이기에.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다면 라오스는 분명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또 자신만의 라오스를 찾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도시의 골목 골목을 걷고 있는 여행자들과 더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추억 속의 라오스와 작별했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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