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페스트'를 다시 읽는 시간

입력
2015.06.05 16:25

전염병을 다룬 창작물들의 문법은 유사한 데가 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미지의 바이러스가 출현한다. 바이러스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인간에게 감염되면 치명적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지역사회에 감염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그 불안을 숙주로 흉흉한 소문들이 퍼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의 숭고함과 밑바닥이 함께 드러난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 지점이리라.

역사상 가장 무서웠던 전염병으로 기록된 흑사병은 카뮈의 ‘페스트’ 등의 명작을 낳았다.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으로 전국이 들썩이는 2015년 6월, 오랜만에 책장에서 ‘페스트’를 꺼냈다. 페스트는 194x년, ‘하나의 평범한 도시’인 알제리 연안의 프랑스 도청 소재지인 오랑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오랑시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오랑시가 어떤 특별한 저주를 받은 곳이었기에 페스트의 습격을 받았나? 아니다. 그곳은 ‘아무리 봐도 낌새가 없는 도시 즉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였다. ‘사람들은 권태에 절어 있으며 여러 가지 습관을 붙여보려고 기를 쓰는 곳’이었고 ‘시민들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일을 하는 곳’이었다. 카뮈는 이렇게 부연한다. ‘우리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런 식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계단에서 죽은 쥐를 발견하는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6일이다. 그 날짜의 상서롭지 못한 느낌에, 한국인 독자인 나는 퍼뜩 놀란다. 작년 4월 16일 이후 우리는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서서히 침몰하는 큰 배에 올라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배가 침몰해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거라는 의심, 심지어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의심, 그 은밀한 의심들이 메르스 사태를 맞아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는 참이다. 2015년 새해가 밝았을 때 각 미디어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꼽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페스트는 4월 16일 이후 금세 퍼져 간다. 수 천 마리의 쥐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간 다음 차례는 인간이다. 도시는 끔찍한 역병으로 뒤덮이고 사람들은 수없이 죽어나간다. 남은 것은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 모르는 대다수, 그리고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려는 소수다. 이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페스트에 맞선다. 절대적인 신을 섬기는 신부 파늘루와 끝까지 악과 맞서려는 젊은 지식인 타루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 구원에 대한 환상 없이 의사의 소임을 다하는 ‘반항’하는 인간 리유가 있다. ‘당신의 승리는 항상 임시적일 뿐’이라는 말에 리유는 대답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투쟁을 멈출 수는 없잖아.” 그는 페스트가 자신에게 끝없는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한 것은 ‘비참’이다. 인간의 비참을 목격한 그는 인간을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끝없이 질지언정 인간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그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결국 페스트는 어느 정도 물러가고 새로운 날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리유는 비밀을 알고 있다. ‘그는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살아남아 있다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감한다. 불안 속에서도 삶은 계속될 터인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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