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천고사설] 전승절은 남들의 잔치인가?

입력
2015.08.13 11:15

러시아는 지난 5월 9일 전승절(戰勝節) 기념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했다. 북한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격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갔지만 한국은 특사로 대신했다. 이때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 9월 3일 열리는 전승절 기념행사도 대통령 참석 여부 논란이 일고 있다. 러시아 전승절은 구 소련이 나치 독일과 싸워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중국 전승절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국 대통령이 일제와 싸워 이긴 전승절 행사에 손님으로 참석해야 하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러시아를 침공한 것은 1941년 6월 22일이었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과 불과 4년 정도 싸웠다. 중국은 어떤가? 본격적인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이니 중국은 일제와 8년 동안 싸웠다. ‘9·18 사변’, 즉 일제가 만주를 도발한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잡으면 14년 동안 싸웠다.

한국은 어떤가? 일제의 정규군과 한국민들이 처음 싸운 것은 1894년 갑오년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과 일제 정규군이 맞붙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듬해인 1895년 을미년에는 의병들이 일제 정규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도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역시 적게 잡아도 수만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갑오전쟁부터 계산하면 우리는 일제와 51년간 전쟁을 치렀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1905년부터 따지면 40년, 군사적으로 완전히 점령당한 1910년부터는 만 35년을 싸웠다. 러시아의 4년이나 중국의 8년, 혹은 14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혹자는 한국이 일제와 싸운 것은 비정규전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중일전쟁 시기 일제는 중국군을 비적(匪賊)이라고 불렀다. 공산당의 홍군(紅軍)은 홍비(紅匪), 국민당군은 백비(白匪)라고 불렀다. 중국군은 정규 군대가 아니었나?

지난 5월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시진핑(왼쪽 세번째)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왼쪽 네번째) 러시아 대통령이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70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지난 5월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시진핑(왼쪽 세번째)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왼쪽 네번째) 러시아 대통령이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70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일본군이 진주한 1894년 이후 이 땅은 늘 전쟁상태였다. 1910년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전국 각지의 망명객들은 1911년 만주 유하현에 모여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개설해서 전쟁 준비에 나섰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0년 6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은 일본군 19사단의 정규군을 격멸시킨 봉오동 승첩(勝捷)을 이뤘고, 같은 해 10월에는 서일ㆍ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과 홍범도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정규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 때 일제는 조선 주둔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浦潮軍) 14사단 4,000여 명 등 모두 2만여 명을 동원했다. 이들과 정면에서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닌가?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는 무수히 많은 군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역임했던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37년 만 59세로 순국했다.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던 오동진은 1926년 12월 장춘(長春)에서 체포되어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다가 궐석 상태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오동진은 옥중에서 수 차례 단식투쟁을 단행하다가 1944년 12월 옥사했다.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 정이형은 1927년 3월 일제에 체포되어 1945년 8월 17일까지 18년간 투옥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제와 총을 들고 싸웠던 군 간부들이었다.

광복 후에도 광복 같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면서 아직까지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식민사관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894년부터 일제와 전시상태였다. 일제가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짜가 9월 2일인데, 그 다음날이 중국의 전승절이다. 중일전쟁 때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것은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었다. 그래서 중화민국(中華民國ㆍ대만)은 9월 3일을 항일전쟁승전기념일로 삼아 3일 동안 연휴에 거국적인 경축행사를 연다.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 9월 3일을 전승절로 삼은 것은 2014년이었으며, 올해에야 처음으로 법정 휴일로 제정했다. 말하자면 뒤늦게 승전의 주역임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미국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여러 참전국을 대표해 일제의 항복서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와 가장 오랫동안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대한민국은 남의 나라 승전절 행사에 초대 받고 참석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손님’으로 전락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문과 함께 적국의 수괴인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가 사형당한 이봉창 의사의 항전 정신을 생각해도 대한민국은 전승절 행사의 주인이지 객(客)일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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