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화양연화] 제주식탐여행의 새 바람

입력
2016.08.05 15:38
제주 식재료와 스페인 요리의 만남, 옥돔 빠에야
제주 식재료와 스페인 요리의 만남, 옥돔 빠에야

“가족들이랑 3박 4일 서귀포 갈 거야. 뭐 먹지?” “혼자 가도 괜찮은데 어디 없어?”. 제주에서 몇 달 지낸 덕에 친구들의 질문이 그치질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여행 일번지, 제주도. 물음표 속에는 항상 ‘맛집’이 있다. 처음에는 제주도를 보러 가더니, 다음에는 걸으러 가고, 이제는 먹으러 간다.

제주식탐여행은 일단 자리물회를 한 그릇 먹고 시작해야 한다. 자리돔은 제주 사람들의 여름을 책임지던 생선으로, 제주의 대표 어종 중 하나다. 자리를 잘게 썰고 된장을 휘휘 푼 후, 얼음을 퐁당 넣으면 끝이다. 오도독 씹히는 식감과 시원하고 담백한 맛에 더위가 저 멀리 달아난다. 간단히 만든 자리물회 한 그릇에 깊은 맛이 숨어있다.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고향이 제주인 친구들이 여름만 되면 ‘앓이’를 하는 것도 자리물회다. 그 친구들에게 어느 집 자리물회가 맛있냐고 물으면, “우리 엄마가 해주는 물회지”라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제주의 물회는 속초나 포항의 물회와 다르다. 된장을 기본양념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제주의 자연환경이 있다. 지금이야 육지와 다를 바 없이 많은 식재료를 사용할 수 있지만, 과거 제주에는 고춧가루가 귀했다. 고추가 자라기도 쉽지 않았고, 습도가 높아 잘 마르지도 않았다. 반면 맛 좋은 된장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물회뿐만 아니라 고사리육개장이나 몸국 같은 제주 전통음식을 맛보고 나면 제주 된장을 절로 이해하게 된다.

제주산 흑돼지 목살 스테이크
제주산 흑돼지 목살 스테이크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는 돼지고기다. 22년 전 제주를 처음 여행할 때부터 하루가 멀다고 제주를 들락거리는 지금까지 제주로 유혹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 녀석이다. 두툼한 덩어리가 불판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변신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어여쁜 장미 한 송이’처럼 석쇠 한가운데 자리한 멜젓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이 넘친다. 돼지고기구이뿐만 아니라 돔베고기, 돼지두루치기, 돼지 샤브샤브 등 육지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돼지고기의 화려한 변신을 볼 수 있는 것도 제주여행의 즐거움이다.

제주식탐여행을 부채질하는 새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이 때문에 제주 맛 지도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매년 간판이 바뀌는 홍대거리만큼이나 속도가 빠르다. 속도를 이끄는 중심에는 제주 이민자들이 있다. 빡빡한 도시 삶에 지친 이들이 숨 쉴 곳을 찾아 제주를 찾고 있다. 한 달 살려고 왔다가 일 년을 보내고 그러다 아예 제주에 터를 잡는다. 제주 이민자 수는 2010년 이후 16만9,000명으로, 제주도민의 26%에 이를 정도다. 사람이 오면 문화도 따라온다. 된장을 기본으로 하던 제주 음식에 고추장과 짭조름한 간이 들어간 것은 제주로 시집온 전라도 여인들의 영향도 적지 않다. 제주가 말의 고장이 된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몽골 사람들이 말과 목축기술을 가지고 오면서부터다.

제주 이민자들이 제주의 흔한 식재료 딱새우를 이용해 만든 새로운 요리.
제주 이민자들이 제주의 흔한 식재료 딱새우를 이용해 만든 새로운 요리.

지금은 육지에서 제주로 날아간 이민자들이 제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방어나 옥돔, 갈치, 자리, 뿔소라 등 제주의 싱싱한 식재료를 이용해 파스타를 만들고 짬뽕을 낸다. 육지의 음식과 모양이 비슷해 친숙하나 기본 재료가 다르니 맛은 신세계다. 제주의 식탁에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식당의 분위기다. 이민자들이 만든 식당이 오히려 제주전통식당보다 더 제주스럽다. 창 하나쯤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고, 식당 곳곳에 소라껍데기가 쌓여있다. 바닷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구멍 숭숭 뚫린 돌 쌓인 담 하나쯤은 걸치고 있다. 섬사람들은 매일 지겹게 보던 제주 풍경이 이민자에게는 제주의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터. 이민자들은 일 년에 제주를 한번 찾을까 말까 한 여행자들과 눈높이가 비슷하다. 그러니 여행자들이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아기자기한 소품과 자잘한 스토리는 덤이다. 방배동에서 인기를 구가하던 식당의 어느 셰프는 제주의 식재료에 반해 내려왔다더라, 고산에 있는 빵집 부부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왔다더라 등등. 주인장 하나하나 사연 없는 집이 없다. 긴 고민 끝에 제주를 선택하게 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음식 맛은 더 진해진다. 제주의 새로운 바람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다.

채지형 여행작가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