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출 칼럼] 박근혜 대통령의 법의식

입력
2017.02.12 12:42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던진 의문은 한국사회에서 정치권의 법의식이 얼마나 변했는가이다. 탄핵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 태도는 구태연한 법의식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서 일한 나를 탄핵으로 몰아 세우느냐는 대통령의 항변이 그것이다. 대통령과 대통령 측근들은 대통령의 청렴결백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의도를 선의로 포장하고 있다. 최순실 사태를 통해 대통령이 소위 ‘먹지 않았고, 챙기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자신은 부패의 진행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숨겨져 있는 억울함은 과거 정권과 내가 한 게 뭐가 그리 다르냐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대통령 측 주장에서 한국사회에 팽배한 낡은 관행을 보게 된다. 국가주도형 산업화는 궁극적 성과를 중요시하고 과정과 절차는 수시로 무시했다.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하면서 국가와 기업 간에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또 상급자와 하급 집행자 간에는 절차를 따라 구체적 논의와 명확한 내용을 합의하기보다 상황에 지배되면서 결과만 좋으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 자신도 기업의 경제행위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절차 규정을 무시하는 지시를 내리곤 했다.

그래도 결과가 좋거나 내부의 불법성과 실수가 밖으로 드러나지만 않으면, 그냥 유야무야 되곤 했다. 대신 문제가 밖으로 불거지면 갑자기 법적인 문제로 비화하고 사회적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이때 법은 관련 당사자가 정책 집행과정에서 부정을 통해 홀로 착복하지 않거나 소위 공유한 경우라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곤 했다. 동시에 최종 책임은 기관장이 짊어지면서 하부 직원은 면책되는 게 상례였다. 이런 관행은 공식적 법체계와 실제 관행 간에 커다란 격차를 초래했다. 이런 일관성 없는 법 집행은 범법자들이 범법을 인정하기보다 운이 없어서 걸렸다거나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생각에 매달리게 했다.

특검 압수수사를 방해하고 대면조사를 거부하는 행위에는 박 대통령의 이런 왜곡된 법의식이 숨어 있다. 이번 사태에서 놀라운 점은 민주화가 진행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조차도 구태의연한 법 관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순실 사태 초반에는 성급히 절차적 불법성에 대해서 인정하는 듯하다가 사태가 불리해지면서 스스로 절차를 무시하는 발언은 물론, 사심이 없었다는 상황 논리로 나가고 있다. “선의”였다는 방패를 내세워 그것이 곧바로 불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대통령의 낡은 법의식과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결합해 보면, 최순실 등 주변을 어떻게 대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법 제정에 관여한 전ㆍ현직 국회의원들조차 대통령의 청렴성을 내세워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불법적 청와대 출입이나 비밀문서 노출, 부정인사, 불법시술 등 대통령의 다양한 절차적 불법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런 법의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사심이 없으니 괜찮다거나 할 만큼 했으니 그만 하자는 구태의연한 정서를 보이고 있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정치권의 법의식은 변하고 있는가? 아무리 국가를 위한다는 의도를 내세운다 해도 불법이 될 수 있다는 규범이 어느 정도 인식되고 정착되고 있는가? 또한 자신과 자신과 관련된 사람에 적용하는 잣대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잣대 사이에 간격은 얼마나 줄어든 것인가?

한국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법규범과 사회관행 사이의 엄청난 격차에 시달려 왔다. 한국사회가 한 단계 높은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선의든, 선의로 포장을 하든 불법은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깊이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은 자신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그나마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국사회를 위기에서 구하고 사회통합에 기여하면서 새로운 법문화를 재인식하고 정착시키는 데 박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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