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No War, Yes Peace

입력
2017.11.07 17:19
29면

안하무인인 이가 허세까지 가득한 것을 보면 곧바로 말문이 막힌다. 실질적이고도 강력한 권력까지 가진 이가 그런 꼴을 보이면 암담해진 심정으로 가슴까지 걸어 잠그게 된다. 아예 상대하고 싶지가 않다. 대체로 그런 이들의 대화법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고자세로 사람을 대한다. 누구에게나 더없이 소중한 개인의 일상성을 일체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기이익을 위하거나 선점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일 수도 있다고도 하지만 그렇든 아니든 그런 이들과는 눈빛 하나 섞고 싶지 않다.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거기에 딱 걸맞다고 여겨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개국 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다. 대놓고 실명을 들이대는 게 민망하나 그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오른 뒤 보여주는 경박한 언행 탓에 곱게 설명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못할 게 없다는 그의 말 몇 마디에 한반도가 흔들거리는 작금의 우리 정세가 참으로 안타깝다.

부글거리던 차에 뭐라도 할 일이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달 8일까지 이어지고 있는 ‘반전평화새김전’ 집회 현장을 찾았다. ‘길 위의 신부’로 널리 알려진 문정현 신부와 평화활동가들이 시민들과 함께 전쟁위기가 고조된 한반도에 평화와 공존을 위한 서각 기도를 올리며 매일 저녁마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촛불을 든 이름 없는 시민들이 주인으로 함께 하는 광장의 분위기는 진중하면서도 산뜻했다. 비록 50~60명 정도의 적은 인원이지만 지난해 100만 명을 넘나든 촛불시민들의 열기 못지않게 뜨겁고 흥겨웠다.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발언들이 짙게 드리운 어둠 속 촛불들 사이를 따사롭게 채워주었고, 때마침 생일을 맞은 한 청년 활동가를 위한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미처 합을 맞추지 못한 젊은 대학생들의 춤사위도, 박자를 놓치거나 음정을 거스른 즉석 중창팀의 노래, 정겨운 하모니카와 기타 연주까지, 모두 참여한 시민들이 건네는 연대의 함성과 뒤엉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든든하게 달궈주기에 충분했다. 한 시간 남짓 그 자리에 머무르며 함께 촛불을 든 이들의 눈빛에 섞이는 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성큼 개운해졌다. 시민의 힘이 하나로 모이면 못 이룰 것이 없음을 이미 경험한 덕분일까. 지금의 불안한 정세를 뒤바꿀 특별한 힘이 우리 일상 안에 흐르고 있음을 광장의 소박한 촛불이 말해주었다.

한결 흡족해지는 느낌은 집회가 끝나고 난 후에 들었다. 누군가가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살갑게 어깨를 좁히며 바닥에 모여 앉았다. 낯이 익건 아니건 서로 가까이 오라며 팔을 벌렸고 서로의 몸을 감싸 안았다. 시민들은 각자 ‘No War' 또는 ‘Yes Peace'라고 쓰여진 팻말을 들거나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표시하며 평화의 염원을 담아 뜨겁게 웃고 박수를 쳤다. 슬며시 자리를 빠져 나와 기분 좋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삶의 어느 한 구석은 분명 이들 덕분에 지켜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스쳤다. 다시 광장에 가길 참 잘했다.

임종진 공감 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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