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의 식물과 인간] 민족의 상징 소나무

입력
2018.01.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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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자생하는 나무는 1,000여 종이고 개중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나무는 100여 종이다. 이 가운데서도 으뜸은 소나무다. 소나무는 전체 산림면적의 41%를 차지하고, 한 여론조사에서는 43.8%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았다.

소나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사랑은 유별나다. 나무 이름을 ‘으뜸’을 뜻하는 ‘솔’이라 고 했고, 궁궐이나 왕릉의 재궁(齋宮)도 소나무로만 지었다. 소나무는 잘 썩지 않고, 구부러지되 쉽게 부러지지 않아 한옥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소나무 전성기였던 조선시대에는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라ㆍ경상ㆍ강원ㆍ충청에 봉산(封山)을 정하고, 황장 금표를 붙여 200여 곳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해 소나무를 관리했다. 무단으로 벌채하면 곤장 100대에 처했고, 금산(禁山)에서 금송(金松)을 베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 땅에 소나무가 많아 남은 것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왕실에서 궁궐 자재와 배(전합과 세곡선)를 만들 목적으로 소나무 벌채를 엄격히 제한한 덕분이다.

사대부의 나라였던 조선시대에 소나무 사랑이 특별했던 것은 소나무가 상징하는 선비 정신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즉,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고 한 것은 옛 선비의 몸가짐에 대한 경종이었다. 소나무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역경 속에서도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해 굳은 기상과 절개를 상징했다. 그 전통은 애국가 2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민간에서 소나무는 벽사(辟邪)와 정화(淨化)의 도구였다. 그래서 제의(祭儀)에서는 금줄에 소나무 가지를 꿰어 잡귀와 부정을 차단하려 했고, 아이를 낳거나 장)을 담글 때도 금줄에 숯과 고추, 종이 등과 함께 솔가지를 끼웠다. 정월대보름 전후해 소나무 가지를 문에 걸어둔 것도 부정을 쫓기 위함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소나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식약 양면의 쓰임새도 다양하다. 꽃가루는 다식에, 잎은 송편을 찔 때나 차나 술을 만들 때 쓴다. 줄기의 속껍질로는 솔기떡을, 송진으로는 고약을 만든다. 복령(茯笭)과 송이도 소나무에서 난다. 또 하루에 ha당 4㎏의 피톤치드를 방출해 생기 재충전을 위한 소나무숲 산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소나무가 위험하다. 솔수염하늘소가 옮기는 재선충(材線蟲) 위협이 가장 크다. 1988년 부산 금정산에서 처음 발견된 재선충의 확산을 최대한 차단해 소나무를 살리는 것은 환경과 문화를 함께 지키는 일이다.

정구영 식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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