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의 외교지평] 트럼프의 ‘재개발 외교’

입력
2018.03.11 13:43
30면

올 봄 눈앞에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美 단기적 성과 절실하지만 낙관은 금물

우리가 행동 선후관계, 시간표 만들어야

“조선반도 전쟁과 관련이 있는 3자나 4자가 개성이나 금강산에 모여 종전을 선언하고, 그 다음에 조건이 될 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함께 성사시켜 보길 바란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말의 요지다. 김정일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을 열고자 했던 노무현의 열망을 미국 쪽으로 돌리려 했다. 미국은 ‘선(先) 종전선언, 후(後) 평화협정’ 방식에 반대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정부가 북핵 해결과 평화체제의 판을 만들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반도를 감돌던 전쟁 기운이 봄기운으로 바뀌고 있다. 정파를 초월해서 성원해야 할 일이다. 4월말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만약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리면 그 화면은 초현실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워낙 큰 반전이기에 우려와 경계도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 특사에게 비핵화의 조건으로 ‘군사위협 해소와 체제안전 보장’을 제시했다. 10 년 전 평양 정상회담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북한에게 종전선언이나 체제안전 보장은 한ㆍ미 군사훈련 중단, 핵우산 금지, 제재해제, 북ㆍ미 수교, 주한미군 문제, 경제지원 같은 항목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냉전 해체와 분단의 극복을 의미한다. 그 시간은 분단의 역사에 비례한다.

북한이 원하는 이런 당근들은 미국의 바구니에 들어 있다. 우리가 그 바구니를 같이 잡아야 비로소 한반도의 운전대를 쥐는 것이다. 역대 정부에서 한ㆍ미 공조를 강조한 기본 배경이다. 그런데 미국은 전 세계전략과 기준, 그리고 복잡한 국내 정치 구조를 갖고 있다. 더욱이 지금 미국은 예측하기 어려운 트럼프 행정부가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는 본업에 걸맞게 ‘재개발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기존 건물의 개ㆍ보수보다는 우선 허물고 보자는 것이다. 무역전쟁, 기후변화 협정 탈퇴, 예루살렘 대사관 이전처럼 금기시 되어 온 행동을 감행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북한 핵 문제도 과거 방식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스캔들로 주변 인물들이 사법처리 되면서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사정도 커지고 있다. 11월 중간선거에 지면 2년 후 재선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선거 호재도 필요하다.

트럼프의 선택은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보여 주거나 기존의 판을 뒤집는 것이다. “미국과 비핵화 논의가 가능하다”는 김정은의 말이 전해지자, 즉각 “(협상이나 강압) 어느 방향이던 세게 나갈 준비가 돼있다”고 반응했다. 정치 생명이 길게 늘어져 있는 북한의 시계에 맞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과거 비핵화 합의들도 서로 주고받을 알맹이 보다는 누가 먼저 양보하느냐와 어떻게 검증하느냐를 두고 시간을 끌다가 실패를 반복했다. 검증장치는 폐쇄국가가 극도로 거부하는 개방과 투명성을 요하기 때문에 최대의 난제였다.

트럼프의 재개발 외교는 사탕과 독약을 함께 갖고 있다. ‘분노와 화염’에 앞서 큰 당근을 던져보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봄 우리 눈앞에 펼칠 초현실적 그림의 밑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캔버스가 있다. 북한은 체제와 정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북한 정권 자신만이 그 안전을 궁극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 호랑이 등에 타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ICBM)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이 원하는 당근을 제공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안보 우선주의(American Security First)’의 전리품을 챙기고, 북한은 ‘핵ㆍ경제 병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실제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 핵을 폐기하는 협상은 무기한 이어지는 시나리오다. 그 나마도 무산되면 ‘화염’의 충돌위험이 커진다.

이런 악몽들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주도해서 한ㆍ미와 북한이 주고받을 행동의 선후관계와 시간표를 만들어야 한다. 긴 세월에 걸쳐 한국을 인질로 삼아 “핵은 가졌고 이제 경제를 살리자”는 북한과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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