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의 외교지평] 북한 핵, 다이달로스의 충고

입력
2018.05.0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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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 北비핵화 실현 가능성 높지만

북미 불신 등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아

과하거나 덜하지 않은 진중한 전략 필요

성공의 희망이 실패의 경험을 지배하는 계절이다. 비핵ㆍ평화의 잔에 다시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북한은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를 살리면서 남북 별개 체제로 공존하자고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확실해지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판문점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달라 보이기도 했다. 핵 가진 자의 여유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핵 포기의 진정성을 의심부터 할 필요는 없다. 행동을 주고 받아보면 곧 알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일단 진지해 보인다. 그는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게 업적 욕구가 강하다. 국내 정치 사정상 외교의 조기 수확도 원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커지고 있다. 희망을 현실로 바꾸려면 앞길에 도사린 장애를 확인하고 극복할 길을 마련해야 한다.

첫 번째 장애는 상호불신이다. 미국과 북한의 불신은 지도자 사이의 문제이기 전에 서로의 카드가 비대칭적인데서 생긴다. 예를 들어, 북한은 핵무기와 시설을 폐기하고 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고 본다. 반면 미국은 제재를 해제하고 대북관계를 진전시키더라도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한 먼저 양보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이 북한에 안전을 보장하고 미국에게는 북한의 약속 이행을 보증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기복이 있긴 하나 북중 관계에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엮어 가야 할 일들이다.

다음은 제도 차이와 시간 지체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가 붕괴된 것은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때문이었다. 동시에 미국이 경수로 핵심 부품을 제공하지 못한 것도 작용했다. 미국은 자국 원천의 원자력 기술과 물자를 제3국에 넘기려면 먼저 원자력협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런데 상원이 북한과의 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그 후 북한은 미국에게 상원 비준 동의를 받아오라고 주장해 왔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평화체제의 경우도 비슷하다. 평화체제의 뼈대인 평화조약은 휴전의 실질 당사자인 남ㆍ북ㆍ미ㆍ중 간에 체결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상원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이 조약이 발효된다. 그런데 상원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의 평화조약에 동의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백악관의 권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할 가능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설사 기한을 정해 합의해도 실제 이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이런 배경을 두고 김정은이 판문점 회담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시작’이라고 했을 수 있다. 체제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쇠뿔을 단김에 뽑기 어렵다는 생존이성의 표현이다. 그가 말한 빙산도 거대한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다. 한반도를 덮고 있는 빙하는 ‘비핵화-북미수교-평화조약’이라는 삼두마차가 같이 움직일 때 비로소 녹일 수 있다. 특히 협력과 갈등이 교차하는 미중 관계와도 호흡이 맞아야 한다.

주한미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중국은 “조선반도 문제는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며 주한미군에 반대해 왔다. 그간 미국과 중국은 미군을 포함한 한반도의 미래상에 대해 구체적인 거론을 피해왔다. 트럼프에게는 미래상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1,2년 내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구현하려면 계산에 넣어야 할 조목들이 많다.

그리스 신화는 혁신의 상징으로 다이달로스(Daedalus)를 등장시킨다. 그는 천정만 열린 미로(Labyrinth)에 갇혔으나 새의 날개를 밀랍으로 만들어 몸에 붙인 뒤 아들 이카로스(Icarus)와 함께 크레타섬을 탈출한다. 그런데 이카로스는 너무 높이 날다 바다로 추락한다. 너무 낮게 날면 파도에 휩쓸리고 너무 높게 날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떨어진다는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북핵의 미로에 갇혀 왔다. 다이달로스 같은 접근을 시도하려면 그의 충고도 같이 새겨야 한다.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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