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관(官)의 잘못에 들고 일어나자

입력
2018.08.23 13:57

인류의 역사는 통치자들의 부당한 권력과 선량한 민중들과의 싸움으로 진행된다. 부당한 통치자의 권력으로 선량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탄압을 받으며, 그렇게도 처참한 희생을 당해야만 했던가. 그러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희생을 무릅쓰고도 끈질기게 싸우고 투쟁한 민중들의 힘으로 역사는 아주 느린 속도일망정 민중들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쪽으로 변혁의 문이 열려왔었다. 이런 위대한 변혁의 힘을 다산 정약용은 고대 중국의 탕왕(湯王)으로부터 나왔다고 믿으며, 포악한 군왕에 항거하여 부당한 권력을 방벌(放伐)해버린 혁명이 바로 정당한 역사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역사 해석으로 통치자(목민관)의 지위에 있던 1797년 36세의 다산은 부당한 권력에 항의하다 전국에 수배되어 도망 다니다가 자수해 온 이계심(李啓心)이라는 농민 반란군 주모자를 재판을 통해 무죄 석방하는 탁월한 재판관이 되었다. 곡식 두 말의 세금을 받아야 했건만 아홉 말의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탐학한 목민관에게 항의하여 농민 1,000여 명을 이끌고 관아에 침입하여 “군수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항의한 반란군이자 역적이라고도 뒤집어씌울 수 있는 사람의 잘못을 묻지 않았다. 도리어 당연히 항거해야 할 일을 감행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무죄석방을 했던 220여 년 전 재판관 다산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반란군 수괴로 쫓기던 이계심은 다산이 신관 사또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백성들이 당하던 민막(民瘼) 10여 조항을 적은 문서를 사또에게 바치며 자수하였다. 재판을 통해 두 말의 세금을 아홉 말을 받았다는 등이 사실임이 확인되자, 주저 없이 재판관 다산은 판결문 주문인 ‘무죄 석방하다’와 판결이유까지 정확하게 발표했다. “목민관(통치자)이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다른 백성들이 당하는 폐막을 보고도 목민관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謀身 不以瘼犯官也 如汝者 官當以千金買之也: 자찬묘지명)”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명재판을 분석해보자. 판결 이유가 너무나 멋지다. 자신이 당할 수 있는 형벌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이 당하는 민막을 들어 통치자에게 항의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목민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형벌을 내리기 보다는 세상이 맑고 밝아지기 위해서 천 냥의 거금을 주고라도 관에서 사야 할 사람이라면서 국민의 저항권을 확실하게 인정하여 무죄를 내린 판결이다. 재판관은 오직 판결로써만 말한다고 했는데, 다산의 이 판결이야말로 역사와 시대를 뛰어넘는 명판결이자 세상을 변혁시킬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였다.

20세기 후반, ‘한국적 민주주의’가 판을 치고 군사독재자가 온 나라를 짓누르고 있을 때, 민주화 운동가들은 바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말하기 좋아하고, 통치자들에게 항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탄압을 받아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200년 전 봉건 왕조가 다스리던 절대군주국가 시절에 관의 잘못을 집단적으로 항의했던 사건으로 주모자를 무죄석방하면서 크게 칭찬까지 했으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목민관으로 발령받아 떠나올 때 중앙정부의 대신들조차 주동자 몇 명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고 말했던 사건인데, 재판관의 양심과 법에만 의지하고 일체의 외부 판단을 고려하지 않았으니, 다산의 뚝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21세기의 오늘에도 국민의 ‘저항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정약용은 백성들이 곡산의 주인임을 만천하에 선포했던 혁명적인 판결을 내렸었다. 그래서 오늘도 다산이다.

이계심을 무죄 석방한 다산의 ‘국민 저항권’ 논리는 그의 유명한 논문 ‘원목(原牧)’이나 ‘탕론(湯論)’에 응축되어 있다. “목민관이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지, 백성들이 목민관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牧爲民有 民不爲牧生)”라는 ‘원목’의 논리가 바로 이계심 사건 판결 이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지 않는 통치자는 언제라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는 ‘탕론’의 논리도 크게 보면 국민 저항권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18세기 말인 1797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통치자는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명제가 다산의 재판을 통해 역사적 현실로 실현된 사건이었다.

그런 명확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건만 얼마나 오랫동안 독재자들이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들은 권력자들의 착취의 대상이자 노예가 되어 굴종만 하고 살아야 했던가. 역사는 그렇게 비극으로 전개될 때가 많다. 4ㆍ19도 있고 5ㆍ18항쟁도 있었으나 한 순간의 국민저항으로 끝났다. 그 뒤로도 우리는 얼마나 긴 시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가. 지난 해 봄까지의 광화문 촛불은 참으로 위대한 다산 정신의 계승이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이제는 제대로 후퇴하지 말고 계속되는 촛불 혁명만 끌고 가자.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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