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대중의 역린

입력
2019.08.02 04:40
25면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 이미지.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아무리 물러 터진 왕이라도 역린은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송강호)은 신하 정인지(최덕문)가 한글 창제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비판을 늘어놓자 ‘역린(逆鱗)’을 이야기한다. ‘역린’이란 말은 ‘한비자’에 이렇게 등장한다. ‘용이란 짐승은 잘 친해지기만 하면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 아래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이 있어 만약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만다. 임금 또한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사람이 임금의 역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비자’의 지적은 마치 잘만하면 설득이 가능하다는 뜻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꾸로다. 유세를 통해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일이 실로 어렵다는 걸 드러내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랏말싸미’의 유세는 잘 설득되었을까.

영화 ‘나랏말싸미’는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담았다. 지금은 별 생각 없이 편리하게 쓰고 있는 한글이지만 그 창제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는가를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발음기관을 따서 하나하나 소리를 분별해내고, 좀 더 쉽게 쓸 수 있게 점과 선, 그리고 최소한의 면을 이용해 가장 간단한 글자를 만들어낸 한글의 놀라움이 그 창제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어떻게 하면 먹고 살기 고단한 백성들도 쉽게 습득해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심해 자음과 모음의 수를 최소화하려는 세종의 노력에서는 애민정신이 보인다. 무엇보다 한자를 통한 유자들의 정보 독점이 나라를 망칠 수 있다며 한글을 통해 모두가 정보를 공유하게 하려는 세종의 의도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마저 읽힌다. 권력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영화 ‘나랏말싸미’는 이토록 괜찮은 세종과 한글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도 대중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영화가 한글창제 과정을 담는데 있어서 신미(박해일)라는 스님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심에 세워두면서다. 영화 속에서 세종은 홀로 한글 창제를 고민해왔는데, 신미는 그 고민의 흔적들을 보고는 한 마디로 ‘헛짓거리’를 했다 일갈한다. 그리고 그가 능통한 소리문자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원리를 참고해 ‘주도적으로’ 한글을 만들어 나간다. 세종은 일종의 지시를 내리고 검수를 하는 역할로 물러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들과는 너무나 다른 해석이다. 결국 ‘나랏말싸미’는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물론 영화는 시작 전 자막을 통해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며,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또 영화에 있어 상상력의 틈입은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허용되어야 마땅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상상력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전면적으로 왜곡하거나 축소, 과장하는 일은 제아무리 예술적 허용이라고 해도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예술적으로 잘 포장되고 새로운 상상력이 덧씌워진 작품이라도, 대중들이 그냥 넘길 수 없는 ‘시대의 역린’은 존재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해석은 해석하는 시대의 관점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과거를 굳이 돌아보는 것은 그것을 통해 현재를 읽어내고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이 지점을 두고 생각해보면 ‘나랏말싸미’의 이른바 ‘해석’은 과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또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는 걸까. 물론 그건 한글창제 과정에 담겨 있는 ‘애민’과 ‘민주화’에 대한 의미를 전하려 했던 것일 게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글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선물을 안겨준 세종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그 자리에 신미라는 인물을 중심에 세워 넣는 일이 어째서 필요하단 말인가. 세종의 한글 창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위대한 유산이자, 문화 창조의 뿌리와도 같다.

감독은 뒤늦게 논란이 심각해지자 영화가 세종의 업적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포스터에 이미 적힌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의 시작’이라는 문구는 이 이야기를 역사와 병치하고 있지 않은가. 세종의 한글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한글을 만들고 배포하는 걸 막으려는 ‘밀본’이라는 세력이 상상의 스토리로 더해져 있었다. 즉 상상의 자유로운 틈입이 있었지만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그건 모든 상상을 허용하더라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 즉 세종의 한글 창제와 그 의미를 이 시대에 맞게 되살렸기 때문이다.

상상은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역사를 두고 벌이는 상상은 더더욱 그러하다.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우리 대중들의 불매운동이 활활 타오르게 된 건, 애초 이 문제의 시발점이 됐던 역사에 대한 저들의 엉뚱한 상상과 해석 때문이었다. 저들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의 용, 대중들의 역린을. 그것도 생각을 모으고 전파하는 세종의 유산, 한글이라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는 용의.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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