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보수의 품격, 품격의 언어

입력
2019.08.19 18:00
29면
진보의 언어는 전투적인 경우가 많지만 보수의 언어는 품격과 위트가 있어왔다. 보수가 쉽게 무너지지 않은 힘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나 지지자가 유지해온 그런 언어의 품격에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진보의 언어는 전투적인 경우가 많지만 보수의 언어는 품격과 위트가 있어왔다. 보수가 쉽게 무너지지 않은 힘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나 지지자가 유지해온 그런 언어의 품격에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어는 단순히 정보와 감정을 교환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 어떤 문장을 쓰는지, 어떤 어휘를 사용하는지가 때로는 한 사람의 인격과 사회의 품격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 어휘가 삶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품격 있는 사람의 언어에는 품격이 담겼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것과 다르다. 말과 글을 다루는 건 사람이지만 때로는 그것들이 사람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품격과 품격의 인격은 대부분 일치한다. 갈수록 말들이 거칠고 험하다. 무책임한 말들이 난무하는 건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일에는 무신경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 뱉는 말들은 위험하다.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떠넘긴다. 건설회사 CEO였던 명성으로 서울시장이 되더니 대통령까지 넘본 사람의 말은 가볍고 무책임했다. 어떤 대학에 가서 BBK를 자신이 설립했다고 자랑했다. 토건업자 이미지를 벗고 미래 금융 아이템을 선도했다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였다. 나중에 그게 자신의 발목을 잡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했다. 거기에 투자한 사람들은 큰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한 푼의 피해도 받지 않으려고 김경준과 거래했고 검찰과 사법부까지 움직이려 했다. 심지어 미국에서의 재판 비용을 기업에 떠넘기는 파렴치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나중에 밝혀진 진실이다. 어쨌거나 두고두고 그 문제가 불거지자 어떤 정치인은 “주어 없다”는 희대의 말로 거들었다. 그녀의 말에는 여전히 ‘주어’가 궁금하다.

욕설과 고함은 거칠고 험하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고약한 말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내뱉는 근거 없는 말들이다. 광복절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모인 자칭 보수인 수구 집회에서 나온 말들을 보면 가관이다.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과거 ‘극렬좌빨’이었던 이는 대통령을 비난하며 “대통령이 되더니 ‘간땡이’가 부었다.”며 태극기로 빨갱이들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동의 말만 난무한다. 아베 수상에게 죄송하다며 우리를 뜨악하게 했던 당사자는 ‘Kill Moon to save Korea(한국을 구하기 위해 Moon을 죽여라)’라는 팻말을 들었다. 수구가 날뛰면 보수가 야단쳐야 옳다. 그런데 자기편으로만 여기니 강 건너 불이다. 오히려 부채질하러 나선다. 그게 건강한 보수를 무너뜨리는 걸 모른다.

고민과 성찰이 담긴 언어의 부재는 보수를 부끄럽게 한다. 진보의 언어는 전투적인 경우가 많지만 보수의 언어는 품격과 위트가 있어왔다. 그런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보수가 쉽게 무너지지 않은 힘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나 지지자가 유지해온 그런 언어의 품격에 있다.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파편과 같은 말들을 쏟아내며 심지어 반헌법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섬뜩할 지경이다. 지난 정권은 품격과 책임감을 상실한 보수의 민낯을 드러냈다. 거기에 실망한 시민들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민망한 상태로 악화한다. 정당의 대변인은 정치언어의 바로미터다. 야유와 비난도 근거와 품격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저잣거리 언사보다 거칠고 험한 말들을 쏟아낸다. 오죽하면 그로 인해 보수야당의 확장성에 장애가 된다고 교체될까. 그러나 그걸 부끄러워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1900년 윈스턴 처칠이 처음 출마했을 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표를 부탁했다. 어떤 집을 방문해서 처칠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집주인이 말했다. “당신을 찍어달라고? 차라리 악마에게 표를 던지겠소!” 그 말을 듣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정작 처칠은 태연했다. “압니다. 그렇지만 혹시 당신의 친구분이 출마하지 않는다면 표를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위트는 단순히 순발력에서 오는 게 아니다. 늘 언어에 대해 훈련하고 자기 말의 힘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온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신의 품격과 언어의 품격을 동일하게 보는 시선에 있다. 긴급하거나 어려울수록 더욱 더 품격 있는 언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게 진짜 보수의 힘이다.

보수의 언어는 무엇보다 헌법 정신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어떤 감언이설도 교언영색도 그게 없으면 껍데기 말일 뿐이다. 과연 지금 우리의 보수가 그런 성찰과 언어의 일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물어야 할 시기다. 나는 ‘건강한 보수’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런데 품격은커녕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고 거기에 환호작약하는 자들이 설치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 옆에 서기도 민망하다. 건강하고 건전한 보수의 모습이 그립다. 그래야 당당하게 “나는 보수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품위 없고 무책임한 선동과 무분별한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는 품격 없는 자들부터 추방해야 한다. 보수의 품격을 되찾아야 한다. 언어의 품격을 회복해야 한다. 회복할 품격이 애당초 없는 자들은 쫓아내야 한다. 당당하게 ‘주어’를 밝히는 문장이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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