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생각의 감염

입력
2019.08.29 18:00
29면
‘사관’이라는 허울을 쓴 채, 거짓된 사실을 진짜인 양 퍼트리고 확산하는 이들은 생각이 감염된 좀비들을 연상시킨다.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거짓된 사실과 생각들이 책과 인터넷을 타고 번져가는 또 다른 재난의 공포가 아닌가. 사진은 22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남성이 ‘반일 종족주의’를 들고 가고 있는 모습. 서재훈 기자
‘사관’이라는 허울을 쓴 채, 거짓된 사실을 진짜인 양 퍼트리고 확산하는 이들은 생각이 감염된 좀비들을 연상시킨다.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거짓된 사실과 생각들이 책과 인터넷을 타고 번져가는 또 다른 재난의 공포가 아닌가. 사진은 22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남성이 ‘반일 종족주의’를 들고 가고 있는 모습. 서재훈 기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좀비 장르를 접목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이른바 생사초로 죽은 왕을 되살리려는 영의정 조학주(류승룡)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왕은 살아나지만 좀비가 되고 왕의 빈자리를 대신 차지한 조학주는 ‘국정을 농단’한다. 통제 능력을 상실한 조선 땅에 번져나가는 좀비라는 역병은 말 그대로 ‘헬조선’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킹덤’은 이로써 조선시대 좀비의 이야기를 통해, 국정공백과 콘트롤 타워 부재가 만드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을 그려낸다.

‘킹덤’이 흥미로운 건 좀비를 ‘춥고 배고픈’ 민초들의 면면으로 캐릭터화한 점이다. 낮에 집 마룻바닥 밑으로 숨은 좀비 하나를 끄집어내려 하자, 다닥다닥 붙어 줄줄이 끌려 나오는 좀비들의 모습은 춥고 헐벗은 민초들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또 어두워지면 먹이(?)를 향해 떼를 지어 달려드는 좀비들은 배고픈 민초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래서 ‘킹덤’의 좀비들은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다. 오히려 이들보다 더 좀비처럼 느껴지는 건 그래서 조학주다. 그는 권력욕의 노예가 되어 생각 자체가 점점 마비되어 간다. 이른바 ‘생각 좀비’의 공포가, 춥고 배고픈 좀비의 연민과 대비된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누가 소녀상에 침을 뱉는가’를 보다 문득 이 ‘생각 좀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지난 달 안산 평화의 소녀상에 침을 뱉고 모욕적인 행위를 했던 피의자의 전혀 죄의식을 느낄 수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제 자신을 친일파라고 생각해요. 막말로 조선시대 때 얼마나 미개했습니까?”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걸로 평가했고,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였으며, 당시의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마치 평화롭던 거리에 갑자기 좀비 하나가 튀어나온 듯한 섬뜩함이었다. 그들의 사고와 생각은 상식과 진실을 뒤엎고 몰상식과 거짓을 심지어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더 무서운 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이들을 따라가 보니 그 ‘생각의 감염’ 경로가 보였다. 그것은 최근 ‘반일 종족주의’라는 논란의 책을 써낸 이영훈을 위시한 이승만학당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이면에 일본 우익의 지원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26일 YTN은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저자인 이우연이 지난 달 UN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높았고, 전쟁기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살았다”고 발표한 이면에 일본 극우단체의 지원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소녀상에 침 뱉은 청년을 마루 밑에서 끄집어냈더니 줄줄이 엮어져 달라붙은 ‘친일 학자’들과 일본 극우단체, 그 위로 아베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회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사관’이라는 허울을 쓴 채, 거짓된 사실을 진짜인 양 퍼트리고 확산하는 이들은 생각이 감염된 좀비들을 연상시킨다.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거짓된 사실과 생각들이 책과 인터넷을 타고 번져가는 또 다른 재난의 공포가 아닌가.

좀비 장르가 주는 공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괴물이 된 좀비에게 물어 뜯겨 죽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좀비가 되는 것의 공포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미국드라마 ‘워킹데드’ 같은 서구의 좀비장르가 주는 공포는 주로 전자다. 하지만 ‘킹덤’ 같은 우리 식으로 해석된 좀비장르가 주는 공포는 후자에 더 맞춰져 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사고능력을 모두 잃어버려 심지어 자신의 아이나 부모까지 공격하는 좀비가 되는 일이다. ‘반일 종족주의’ 같은 생각의 감염이 주는 공포 역시 후자에 맞춰져 있다. 우리의 생각이 감염되어 우리끼리 물고 뜯으며 만들어내는 지옥도의 공포.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런 감염된 생각들이 어째서 무시되지 않고 번져나가는 걸까. 그건 이런 생각들이 대중들이 갖고 있는 결핍과 허기 같은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 간 경제 불황 속에서 만들어진 정부에 대한 막연한 반감과 불신, 가진 자들의 편에 선 법과 정의를 목도해온 서민들의 허탈감, 경쟁 시스템이 주는 배제의 공포 무엇보다 입시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교육의 부재. 이런 결핍과 허기들은 생각 감염의 틈을 만든다.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백신이 필요하다. 이 역병의 진원지가 감염된 역사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백신은 바로 그 올바른 역사의식을 세울 수 있는 제대로 된 교육과 연구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수탈’을 심지어 ‘개발’이라고까지 말하는 감염된 역사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또한 서민들의 결핍과 허기들을 채워줌으로서 웬만한 감염에도 끄떡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면역력 강화 역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