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식 칼럼] 길 잃은 이해찬의 ‘20년 집권론’

입력
2019.10.17 18:00
30면

“진보정권 10년개혁 좌절 되풀이말자”소신

청와대 ‘조국사랑’ 방치, ‘버럭 성질’도 죽여

당 안팎 사퇴 요구에 ‘30년 정치역정’ 흔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조국 내전’ 후폭풍에 휩싸인 가운데 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원내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 안팎에서 지도부 책임론과 쇄신론이 들끓자 이 원내대표는 이날 자중지란을 경게하며 ‘검찰개혁 단일대오’를 강조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조국 내전’ 후폭풍에 휩싸인 가운데 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원내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 안팎에서 지도부 책임론과 쇄신론이 들끓자 이 원내대표는 이날 자중지란을 경게하며 ‘검찰개혁 단일대오’를 강조했다. /연합뉴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론인 ‘진보세력 20년 집권론’은 좌절을 거름 삼아 키워온 오랜 소신이다. 그는 노무현ㆍ김대중 전 대통령이 잇달아 서거한 2009년 한 집회에서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를 추구한 지도자”라고 두 사람을 기리며 “개혁을 부르짖던 정조가 1800년 돌연 숨진 이래 210년의 역사에서 두 정권 10년은 진보개혁이 집권한 예외적 시기”라고 규정했다. 나머지 200년은 수구기득권 세력이나 외세 독재가 지배한 시기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노무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이 주장을 더 확장했다. “정조 이후 210년 동안 (진보 세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만 집권하고 다시 정권을 잃어 절벽 끝에 내몰렸다”며 “2020년까지 선거가 총선 대선 지방선거가 이어지는데 우리가 정신 못 차리면 벼랑 끝에서 한 손마저 놓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런 경고 덕분인지 진보 진영은 문재인 정부를 통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누구보다 이 대표의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지난해 말 그는 당원토론회에서 또 “정조 이래…”로 시작하는 얘기를 풀며 “문 정부가 들어서고 지방선거도 이겨 이제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20년이 아니라 더 오래 집권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의 얘기에 취하고 못난 야당을 약 올리듯 그는 올 4월 원외위원장 모임에서 ‘260석 싹쓸이’ 꿈도 펼쳤다. 조국 파문이 확대되던 지난달 중순 열린 창당 기념식에선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10년 만에 정권을 뺏긴 후 우리가 만든 정책과 노선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정권을 뺏기면 절대 안되겠구나’라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며 정권 사수 의지를 거듭 불태웠다.

문 정부의 성공과 진보 재집권을 향해 달려오던 이 대표가 돌연 총선 6개월을 앞두고 당내외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한때 그가 조 전 장관의 사퇴를 청와대에 건의했다는 얘기가 나돌며 열성 지지층을 자극하자 당 대변인이 나서 부인하는 소동도 있었다. 하지만 당원게시판에는 “조국도 지키지 못하면서 국민을 지키는 여당이 되겠다고? 노무현 하나로는 부족하냐”는 비난과 함께 이 대표 책임론을 거론하는 글이 쇄도하고 있다. 의원들 사이에서도 집권당 지도부가 청와대에 끌려다니며 상황을 오판해 사면초가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과 지도부 책임을 따지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 대표는 당황스럽고 섭섭할 것이다. 문 정부의 한 축을 이루는 집권당 대표이자 여권의 최다선(7선) 원로인 것은 맞지만, 대통령의 인사권, 특히 공사가 뒤섞인 ‘문재인-조국’ 조합을 건드리는 것은 그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왜 조국인가”를 따지는 당내 불만을 잠재우며 청와대의 검찰개혁 의지를 관철하는 단일대오를 유지하기 위해 ‘버럭’ 성질도 죽인 채 뒤치다꺼리를 도맡은 그로선 억울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런 항변은 역설적으로 당사자 외에 ‘조국 사태’의 가장 무거운 책임은 이 대표로 향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총기가 흐려진 조짐은 지난해 말 김태우 수사관 문제 등 청와대 기강해이 사례가 잇달아 터져 조국 민정수석이 도마에 올랐을 때 감지됐다. 당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 출신인 조응천 의원이 “조 수석이 책임있게 사의를 표명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며 총대를 멨지만, 이 대표는 엉뚱하게 “문책이나 경질 요구는 야당의 정치적 행위”라고 밖으로 화살을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전략가라면 그때 20년 집권론을 저해할 ‘조국 리스크’를 깨닫고 청와대에 강한 메시지를 날렸어야 했다.

두 달여에 걸친 조국 사태에서 이 대표가 보여준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뺏기면 안 된다”고 고함만 쳤을 뿐이다.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퇴진 요구이고 덩달아 ‘20년 집권론’도 퇴출 위기에 몰렸다. 책임 윤리로 말하고 행동할 때를 놓친 잘못 앞에서 그의 30년 정치 역정마저 흔들리고 있다. 검찰개혁이 만병통치약일까.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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