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아는 엄마 기자] 축구하는 1시간, 숙제하는 1시간… 같고도 다른 시간

입력
2020.01.11 04: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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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이 초등학교가 방학식을 했다. 5학년의 마지막 날 아침, 등교를 준비하던 아이가 “이번 학년은 참 빨리 지나간 것 같아. 왜 이렇게 시간이 금방 갔지?” 하며 종알거렸다. “네가 5학년 한 해 동안 학교 생활을 엄청 재미있게 했다는 증거야”라고 나름 ‘과학적인’ 대답을 해줬다.

무심결에 “완전 재미있었지”라고 맞장구를 쳐놓고 나서 아이는 뒤늦게 뭔가 이상한 듯 엄마를 흘겨보더니 질문을 쏟아냈다. 학교가 재미있으면 정말 시간이 빨리 가고 재미없으면 늦게 가나, 시계를 보면 시침과 분침은 늘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데 그게 말이 되나, 학교 말고 다른 데서도 그럼 시간이 빨리 가고 늦게 가기도 한다는 건가. 아이는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내내 엄마 말에 동조해야 할지 반박해야 할지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아이는 전교 최고 서열인 6학년에 올랐고, 엄마아빠는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층에 안착했다. 중년의 눈에 시간은 참 쏜살같다. 젖 먹던 아이가 어느새 엄마 말에 토를 달고, 모아둔 돈은 없는데 야속하게도 나이만 들어간다.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의 생체시계가 나이를 먹을수록 느려지기 때문에 몸 밖 세상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설명한다. 생체시계는 잠을 자고 깨거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등의 주기적인 생활리듬, 생리현상을 통제하는 인체 시스템을 이르는 말이다.

생체시계는 체내 생리작용이지 뇌의 의식활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설명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년 어른도 종종 시간이 늦게 간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어른들보다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빠른 아이들은 ‘생체시계론’에 따르면 늘 몸 밖 세상의 시간이 더디다고 느껴야 한다. 아이가 5학년이 후딱 지나간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 요인을 생체시계만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아이 말처럼 시침과 분침은 늘 일정한 빠르기로 움직이다. 하지만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숫자에 불과할 뿐 시간의 본질을 담고 있지 않다. 시계 역시 인간이 만든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는다. 몇 시에 뭘 하고, 몇 년 뒤에 뭐가 되고, 언제 태어나고 죽는지 같은 시간 개념에 굳이 의미를 두는 건 자연에서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은 시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애써왔다. 물리학의 시간은 크게 보면 아인슈타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아인슈타인 이전인 뉴턴의 시대에 시간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이 언제 어디에 있든, 가만히 있든 움직이든 시간은 항상 같은 속도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온 이후 시간은 ‘역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언제 어디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이동한다. 심지어 시공간을 구부리고 뒤틀 수도 있다.

우리 뇌가 일상에서 번번이 복잡한 물리학 원리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수고를 감수할 것 같진 않다. 가장 그럴 듯하게 들리는 설명은 심리학의 시간이다. 시간에 얼마나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그 흐름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이가 지난 1년간 학교생활이 재미없고 지루해서 수시로 시계를 봤다면 시간이 더디다고 여겼을 터다. 반대로 정말 재미있어서 시계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은 날이 많았다면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난 것처럼 기억될 수 있다. 심리학에선 시간에 관심을 덜 갖거나 체험을 덜 할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다고 설명한다.

과학이 찾는 시간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기계적, 물리적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 온 세상 시계가 몽땅 고장 나거나 우주에 엄청난 사건이 생기지 않는 이상 급변할 일은 없어 보인다. 반면 심리적 시간은 두서 없이 흐른다. 어떤 이의 시간은 수 년 전에 멈춰 있고, 다른 어떤 이의 시간은 벌써 몇 년 앞으로 훌쩍 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이 빨리 가네, 늦게 가네’ 투정도 부린다.

아이는 수학 수업 때 짜증 나는 시각 계산 문제를 풀며 기계적 시간의 쓸모를 터득했고, 이젠 숙제 하는 1시간과 축구 하는 1시간이 그렇게 차이 나는 이유까지 깨달아가고 있다. 아이가 점점 빨리 성장하는 것 같은 심리적 시간의 흐름에 조바심 나는 엄마는 문득문득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비틀어서라도 물리적 시간을 되돌려놓고 싶어진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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