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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연재]너무 큰 코끼리를 삼켰다… 헛심만 쓴 일제의 조선 동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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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 무엇인가]<7>침탈, 동화(同化),정체성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식민지 체험은 집단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한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학사판 국사 교과서는 ‘일제 민족 말살 통치와 전시수탈’이라는 제목 아래 “내선 일체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신하와 백성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국사 교과서에서 쓰이는 “동화”와 “수탈”(혹은 침탈)이란 표현은 이 시기에 대한 서로 경쟁하는 해석을 상징한다. 동화해야 하는 이웃 나라를 착취하는 일과 동화하지 않아도 되는 먼 나라를 착취하는 일은 사뭇 다르다. 동화할 필요 없는 먼 나라야, 물자를 강제로 수탈하고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동화해야 하는 나라에는 “먹튀”를 할 수 없다. 그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늘 얼굴을 봐야 하는 상대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뜨내기는 다르다.
한때 유라시아 대륙에 엄청난 제국을 건설한 몽고족을 생각해보자. 정주해서 상대를 동화할 생각이 없었을 때, 몽고족은 상대를 잔인하게 정복하고 강제로 물자를 빼앗았다.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전쟁에 승리할 경우 그 수익(return)은 엄청나지만, 패배할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겨서 전리품을 끊임없이 나누어주지 않으면, 부하들은 이탈할 것이다. 패배해서 멸망하지 않으려면, 전리품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잔인한 침탈에 나설 수밖에 없다.
침략자가 잔인할수록 피침략자는 영웅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 독립투쟁사에서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같은 영웅적인 무장투쟁을 부각시켜 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가혹한 일제 침탈과 영웅적인 무장투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무장투쟁에 임하는 피식민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지만, 잔인한 침략자도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몽고족을 설득했다. 뭐 하러 피곤하게 매번 사람 죽여가면서 물건을 빼앗나요? 세금을 걷으세요. 세금이야말로 안전하고 확실한 “착취” 방법이에요. 세금처럼 합법화된 “착취”는 대개 무장투쟁을 촉발하지 않는다. 과태료를 물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부지런히 세금을 내고 연말정산에 나선다. 귀가 솔깃해진 몽고족은 세금 제도와 과거시험 제도를 받아들이고 피지배자인 한족과 불평등하나마 공존을 모색했다.
이것이 어디 몽고족만의 사정이랴. 강제 수탈을 지속하는 건 제국주의 일본으로서도 피곤한 일이다. 3ㆍ1 운동 과정에서 잘 드러났듯이, 한국인은 억누른다고 얌전히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영웅적인 무장투쟁을 통해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말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적 상황과 아울러 한국인의 무장투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현재 진행형인 이슈다.
근년에 동북아역사재단 신효승 연구위원은 청산리 대첩의 전과(戰果)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청산리 전역에 대한 정확한 전과의 전달보다 독립군의 건재와 독립 의지의 표명”을 위해 불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청산리 대첩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문제가 있고, 사사키 하루타카(佐佐木春隆)와 같은 일본학자처럼 청산리 전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봉오동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승리했다고 본 것도 문제이다. 그가 기존 사료를 꼼꼼히 검토해본 결과, 청산리 전투의 전과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설령 주요 무장독립투쟁의 성과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당시 한국인들이 묵묵히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가 잔인한 침략으로 점철되었다기보다는 상당 부분 연성 권력(soft power)을 통한 동화 과정이었다고 전제했을 때,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저항들이 있다.
식민지 정부는 근엄한 자세로 조선을 “근대화”하고 “일본화”하기 위해 신사(神社)를 만들고, 박람회를 개최하고, 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천황을 숭배하는 조선 신궁(朝鮮神宮) 앞에서 한국인들은 술판을 벌였고, 제국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박람회에서 한국인 여성 가이드는 한 번에 50전을 받고 볼 뽀뽀를 해주며 돈을 벌었다.
근대적 위생을 선전하기 위해 공중변소를 지어 놓았더니 소변기에 올라가 대변을 본 한국인도 있었다. 환경 미화를 위해 가로수를 심어 놓았더니 뽑아 집으로 가져가 버린 한국인도 있었다. 쓰레기 좀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고 쓰레기통을 무상으로 나누어주었으나, 끝내 쓰레기통을 쓰지 않는 한국인도 있었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토드 헨리의 ‘서울, 권력 도시’(원제는 ‘서울 동화하기 Assimilating Seoul’)는 일견 한심해 보이는 이러한 행동들을 꼼꼼히 복기한 뒤, 이런 행동들이야말로 한국인을 황국신민으로 동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미시적 저항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와의 싸움은 찬 바람 휘몰아치는 만주벌판에서만 벌어졌던 것은 아닌 셈이다. 전혀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던 이런 “찌질한(?)” 비행(非行)이야말로 청산리 대첩이나 봉오동 전투 못지않게 일본 제국주의를 괴롭힌 독립운동(?)이었는지도 모른다.
동화도 침략만큼이나 피곤한 일이다. 동화를 시도하면, 동화를 당하는 쪽뿐 아니라 동화를 하는 쪽의 정체성에도 변화가 생긴다. 청나라는 변경의 많은 민족을 병합하여 영토를 두 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한층 더 복잡한 다민족 국가로 변모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현대 중국 정부는 아직도 소수민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조선을 삼킨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전의 일본’과 같을 수는 없다. 조선인과 같아진 일본인이 그 전의 일본인과 같을 수는 없다. 내선일체를 시도하면 조선(鮮)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內)도 변하는 것이다.
식민지 정부는 조선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선진적인 일본 문화에 동화되기를 촉구하였지만, 모든 일본인이 이러한 동화 정책에 환영한 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야 내선일체를 통해 조선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싶었겠지만, 조선 내 일본 거류민들의 상당수는 내선일체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강조해서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싶어했다.
전 세계에서 1억부 이상 팔렸다는 소설, 누구나 한 번쯤은 읽거나 들어보았을 것 같은 소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도 동화(同化)에 관련된 부분이 나온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에게 틀에 박힌 어른들에 대한 불평을 토로한다. 자기가 보기에 이건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의 모습인데, 어른들은 자꾸 그걸 모자 그림이라고 우긴다고.
그런데 어른들이 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을 힐끗 보고 모자라고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대를 동화시키려고 상대를 잡아먹으면, 일단 몸매가 망가진다. 코끼리를 잡아먹은 뱀이 어디 뱀의 꼬락서니겠는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섹시한 몸매를 가졌다는 뱀조차 모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그 모습을 보고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이라고 이미 주장한 이상, 계속 보아뱀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에 박힌 사고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월요일에 출근하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불 밖은 위험하다!”라고 고함치는 직장인의 모습이다.
큰 먹이를 삼켰다가 에너지가 부족해서 오히려 죽는 뱀들도 있다. 코끼리를 삼켜 버린 보아뱀은 이제 어찌 될 것인가. 상대를 오판한 뱀은 소화를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한다. ‘어린 왕자’에서 코끼리를 삼킨 뱀은 꼼짝달싹 못하고 여섯 달 동안 소화시키며 잠을 잔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동정호(洞庭湖)에 사는 파사(巴蛇)라는 커다란 뱀이 코끼리를 삼키고 삼 년에 걸쳐 소화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삼킨 지 삼십 년이 넘도록 동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음을 이후 역사는 보여준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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