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窓)] 자유무역이 불러낸 내셔널리즘의 망령

입력
2020.02.11 18:00
수정
2020.02.11 18:38
30면

세계화 역풍이 트럼프 보호주의 초래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엔 끔찍한 재앙

분노하는 유권자들은 참신한 후보 갈망

자유무역 확대에 따른 중국 쇼크가 클수록, 이민자 유입이 많은 지역일수록, 유권자들의 표심이 보수 그 중에서도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극우 정당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현상이 미국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미국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유세 행사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는 모습. 디모인=로이터 연합뉴스
자유무역 확대에 따른 중국 쇼크가 클수록, 이민자 유입이 많은 지역일수록, 유권자들의 표심이 보수 그 중에서도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극우 정당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현상이 미국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미국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유세 행사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는 모습. 디모인=로이터 연합뉴스

“탈냉전 이후 세계화를 거치면서 서구의 좌파들은 전략을 수정했죠.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플래카드를 내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단체들을 파고들기 시작한 거죠.” 저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스탠퍼드대 후쿠야마 교수의 진단이다. 좌파가 성소수자, 이민자, 페미니스트 등 정체성(identity)이 뚜렷한 집단의 후견자로 적극 나서면서 이들의 분화된 이해관계를 정치 세력화하는데 올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지지기반의 와해에 있다. 지난 30년간 서구 근로자들 상당수가 보수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다. 당황한 좌파는 새 지지층 모색에 나섰고 소수자(minority) 그룹이 그 타깃으로 떠올랐다.

소외된 이들을 보듬겠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후쿠야마 교수는 그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소수자 그룹이 과거에는 ‘차별의 철폐’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다른 집단보다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며 이를 정치 행위를 통해 쟁취하려 한다. 우파는 소외 그룹을 내셔널리즘으로 변형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나 영국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그리고 난민 강경책을 내세운 오스트리아 국민당이나 카탈루냐 독립을 반대하는 스페인 복스(Vox)의 약진 등이 좋은 예다. 인종이나 민족을 정체성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각종 단체를 이끌고 관리하는 역량 면에서 독보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조직되거나 성장한 수많은 시민·사회단체, 직능단체, 노조를 여전히 핵심 지원군으로 거느리고 있다. 여기에 퀴어축제나 미투운동, 탈원전정책에 연금지원책까지 펼치면서 성소수자와 여성, 환경 단체에 노인층까지 끌어안았다. 압권은 청와대 청원제도이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며 20만 이상 청원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이들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새로운 그룹을 포섭하기는커녕 눈앞에 보이는 우호세력조차 애써 외면하고 있다. 광화문 태극기나 기독교 모임이 그 예다. 좌파가 ‘내편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면 우파는 ‘반문(反文) 동맹’ 마저 걷어차는 묘한 형국이다.

이와 관련, 서유럽 15개국을 분석한 이탈리아의 콜란톤ㆍ스타닉 교수의 최근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자유무역 확대에 따른 중국 쇼크가 클수록, 이민자 유입이 많은 지역일수록, 유권자들의 표심이 보수 그 중에서도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극우 정당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현상이 미국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왜 그럴까?

탈냉전 이후 서구의 저숙련 노동자들은 무역 자유화와 공장 자동화 그리고 이민자 증대로 직장을 잃거나 임금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들은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우선 순위에서 소수자 그룹에 밀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외면당한다. 취업 근로자들 또한 소득세가 계속 늘어나자 기존 정치권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결국 근로자들은 ‘피해 보상 요구’를 포기하고 세계화 이전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게 된다. ‘반세계화! 반이민자! 반엘리트!’를 외치는 카리스마형 정치인이 구원투수로 등판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그는 중산층을 의식해 감세를 추진하고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고립주의, 보호주의 정책을 쏟아낸다.

한국에도 극우 내셔널리스트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을까?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로서는 끔찍한 일이지만 다행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반미ㆍ반일 민족주의가 현 집권세력의 전유물인 데다 이민 문제 또한 서구처럼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당의 거듭된 정책 실패와 위선 그리고 야당의 무능과 비겁함을 지켜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기존 정치권에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다. 총선 대선 할 것 없이 이 땅의 유권자들이 참신한 후보를 그토록 갈망하는 이유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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