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바꾼 법들] “자식 잃는 아픔 다시 없게 나섰지만, 떼쓰는 사람 취급도”

입력
2020.02.13 01:00
수정
2020.02.13 09:41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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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족이 나서야 움직이는 사회

'재윤이법' 재윤이 엄마 허희정씨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카페에서 의료사고로 잃은 아들의 사진을 들고 앉아 있다. 허씨는 "아들이 아닌 아들의 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에 (사고로 아들을 잃은 것이) 더 실감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한호 기자
'재윤이법' 재윤이 엄마 허희정씨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카페에서 의료사고로 잃은 아들의 사진을 들고 앉아 있다. 허씨는 "아들이 아닌 아들의 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에 (사고로 아들을 잃은 것이) 더 실감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한호 기자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의 사연 등을 다룬 소설 ‘피프티 피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소설 속 대사지만, 실제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목숨을 잃고, 그 죽음을 계기로 법이 생겼는데, 그 중심에는 유족이 있었다는 뜻이다.

죽음을 계기로 생긴 법(안)들. 그래픽=강준구 기자
죽음을 계기로 생긴 법(안)들. 그래픽=강준구 기자

◇분하고 답답한 마음, 법안 마련으로

간호사 출신인 허희정(41)씨는 2017년 11월 하나뿐인 아들 김재윤(당시 5세)군을 잃었다. 두 살 때 백혈병 진단을 받았던 재윤이는 꾸준한 항암치료로 2018년 3월이면 완치 판정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되던 상태였다. 백혈병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기 증세로 평소 치료를 받던 대학병원을 찾았던 게 모든 걸 바꿔 버렸다. 백혈병 재발을 의심한 의료진은 골수검사를 권했다. 이튿날 재윤이는 수면진정제를 맞고 골수검사를 받던 중 숨졌다. “의무기록지를 분석하면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이 과다 투여된 사실을 발견했어요. 재윤이는 펜타닐을 처음 맞은 건데, 적정량의 두 배에 가깝더군요. 제가 간호사 출신이 아니었다면 밝히기 힘들었을 거예요.”

약물 투여 시 의료진은 환자 상태를 철저히 관찰해야 하지만, 허씨는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했다. 검사가 끝나고 보니 재윤이에겐 입술이 파래지는 청색증이 왔다. 허씨는 “한국의료분쟁 조정중재원의 감정 결과를 보니, 재윤이가 무호흡 심정지 상태로 5분 이상 방치됐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응급조치도 제때 취해지지 못했다. 의료기기가 갖춰지지 않은 일반 주사실에서 검사가 이뤄진 탓이다. “의료진 과실로 사망한 건데, 병원에서는 병사(病死)라고 말해요. 골수 검사 결과도 ‘깨끗하다’로 나왔는데 말이죠.”

재윤이의 정확한 사인(死因)을 밝히려는 노력은 이른바 ‘재윤이법’ 통과 촉구로 이어졌다. 개정 환자안전법을 지칭하는 재윤이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급 의료기관에서 중대한 환자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당 의료기관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지체 없이 보고하도록 한 법이다. 기존에는 보고 여부를 병원 자율에 맡겼기 때문에, 환자 안전사고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고 사고예방 및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허씨는 2018년 5월 환자단체연합회가 마련한 행사에 참석, 환자안전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검사 시 움직이면 안 되기 때문에 진정제를 투여하는 일이 흔해요. 그래서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환자안전보고 학습시스템’ 사이트에 접속해 아들의 사건을 직접 올리기도 했다. 허씨가 1인 시위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거주지는 대구였지만, 두 달에 한 번 이상은 서울을 찾았다. 그해 7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도 올렸다. 재윤이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방지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을 통해 조금씩 사건이 알려졌다. 같은 해 12월에는 보건복지부가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사항을 담은 ‘진정약물 투여 후 환자 감시 미흡 관련’이라는 주의경보를 발령했다. 6개월 전 허씨가 환자안전보고 학습시스템에 사건을 알렸던 게 ‘작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법이 만들어지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1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 1년6개월 이상이 소요됐다. 무엇보다 의사 출신 국회의원의 반대가 심했다. 허씨가 직접 나섰다. “이런 법이 무슨 실효성이 있겠느냐며 제동을 걸었어요. 그러면 의원실을 찾아가 ‘의료사고로 사망하는 이들이 많으니, 제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법이다’라면서 설득하고 다녔어요.”

하준이 엄마 고유미씨가 지난달 29일 경기도 소재 자택에서 하준이법을 통과시키려고 해왔던 활동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하준이 엄마 고유미씨가 지난달 29일 경기도 소재 자택에서 하준이법을 통과시키려고 해왔던 활동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국민청원ㆍ1인 시위에 자필편지까지

거리로 나온 건 허씨만이 아니다. 2017년 10월 경기 과천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아들을 잃은 고유미(38)씨는 지난해 10월 국회 앞에서 각종 사고로 숨진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아들 하준이(당시 4세)가 하늘나라로 간 지 2년이 넘었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준이는 경사진 주차장에서 굴러 내려온 차에 치여 숨졌다.

고씨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 올리기’였다. 그는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경사진 주차장에 경고 문구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하준이를 봉안한 곳에서 비슷한 사고로 온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어이없는 사고로 죽은 아이가 그곳에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죠. 남은 아이들이 있으니까 뭐라도 해야만 했어요.”

2017년 11월 6일부터 30일 동안 14만6,068명의 동의를 받았다. 관심은 뜨거웠지만, 청와대 공식답변 기준인 ‘20만명’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청와대에 직접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고씨는 “알고 지내는 공직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지도 않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자필로 편지를 썼다.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친 순간도 있었다. 지난해 2월에는 큰 마음을 먹고, 하준이 사고 현장을 찾았다. 그곳만이라도 안전하게 바뀌어 있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경사진 주차장은 그대로였다. 1만6,500㎡(약 5,000평) 부지의 주차장이 달라진 게 있다면 ‘주차 시 주의사항’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정도였다. 고씨는 “그걸 보니 주차장법 개정안을 꼭 통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심경을 표현했다. 주차장 관리자에 의무를 지우도록 법으로 강제할 경우, 주차장은 조금 더 안전하게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주차장 소유주의 미끄럼 방지 의무를 강화한 하준이법은 지난해 말 천신만고 끝에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예강이 엄마 최윤주(44)씨도 쉽지 않은 싸움을 벌여야 했다. 100일 이상 1인 시위를 벌였고, 기자회견에도 수차례 참석했다. 2014년 1월 코피가 멈추지 않아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은 예강이(당시 10세)는 7시간 만에 숨졌다. 최씨는 “의료사고 피해자가 돼 보니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고충이 눈에 보였다”며 “더 이상 우리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법이라도 바꿔야 했다”고 전했다. 신해철법으로도 알려진 예강이법은 중대 의료사고 발생 시 병원 측 동의가 없이도 의료사고 분쟁 조정 절차를 개시할 수 있도록 의료분쟁조정법을 개정한 것으로, 2016년 5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예강이법은 이처럼 딸의 사고 이후 한국의료분쟁 조정중재원에 조정을 신청했지만, 병원 측 거부로 힘겨운 법정 소송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씨 가족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힘 없고 돈 없는 사람이 소송까지 가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피해자들이 소송 이전에 구제를 받아 어느 정도 슬픔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강이법' 예강이 엄마 최윤주씨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카페에서 의료사고로 잃은 딸의 사진을 들고 앉아 있다. 이한호 기자
'예강이법' 예강이 엄마 최윤주씨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카페에서 의료사고로 잃은 딸의 사진을 들고 앉아 있다. 이한호 기자

윤창호(2018년 11월 9일 사망, 당시 22세)씨 친구들은 아예 법안을 직접 만들어 국회의원실을 찾아갔다. 만취 음주운전 사고의 피해자인 윤씨가 사경을 헤매던 때, 친구들은 병실 앞에 담요를 깔고 앉아 각종 판례들을 수집했다. 전문가 자문도 수없이 받았다. 윤씨 부친 윤기현(54)씨는 “창호가 행정학과에 다닌 터라, 친구들이 법을 조금 알았다. 외국사례 찾기, 처벌사례 조사하기, 국회의원 이메일 주소 수집하기, 지역구 의원실에 전화하기 등 일을 분담해서 진행했다”고 전했다. 그 결과 음주운전자 처벌을 강화하고, 음주운전 단속기준을 강화한 ‘윤창호법’이 마련됐다.

이해인(2016년 4월 사망, 당시 4세)양의 부모는 ‘어린이 응급조치 의무화’를 골자로 한 해인이법의 필요성을 공론화하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다. 해인이 아빠 이은철(38)씨는 “예능이라 처음엔 부담이 컸지만, ‘안 나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아이 엄마의 말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법안을 알리는 과정에서 유족들은 악성 댓글(악플)과 비난도 감수했다. 이씨는 “심지어 ‘이러다간 아무나 다 이름 붙여서 법 만들겠다’는 악플도 봤다”고 전했다. 재윤이 엄마 허희정씨도 “다른 사람들은 우리 아들처럼 목숨을 잃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 국회에서 떼 쓰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형벌 강화 능사 아냐… 정부 종합대책 필요

다만 희생자 이름이 붙은 법이 계속 나오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 특히 법률 전문가들은 형량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구현 한림국제대학원대 미국법학과 교수는 “약자 편에서 법을 만들어 보호하고자 하는 취지는 좋지만, 법은 모든 국민에 적용되는 것”이라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법안이 생기면 법의 기본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안준성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미국 변호사)도 “문제가 제기된 부분만 가중처벌 할 경우, 짜깁기 식이 돼 버려 법의 구조상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때문에 유사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선 “정부의 종합적인 대책 수립이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 사무국장은 “사건이 터지면 정부가 실태 조사부터 실시해 더 이상 불상사가 없도록 신속히 대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며 “입법은 법을 통해 해결할 게 있을 때만 활용하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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