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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 바이러스만 전염시키는 건 아니다. 인간에겐 문화유전자가 있다. 문화유전자도 끊임없이 복제를 거듭하면서 변화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세상과 인간을 전염시킨다. 마인드 바이러스는 문화유전자다.

아침부터 봄비가 내립니다. 제법 내립니다. 실비가 아니라 작달비입니다. 촉촉하게 토닥토닥 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추적추적 후두두둑 내립니다. 보통 봄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적신다 하는데 오늘은 이 비마저도 사납게 내립니다.

봄비 내리면 남녘엔 꽃망울 터지고 봄은 성큼 올 터인데, 마음은 춘래불사춘입니다. 이맘때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작년보다 며칠 이르네 늦네 보도가 될 텐데 조용합니다. 우리 모두 봄을 맞을 계제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저처럼 매일 출퇴근할 정처가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부르는 곳도 없습니다. 셀프 자가 격리를 선택했습니다. 지루하면 동네 뒷산에 오릅니다. 왠지 그곳만은 바이러스 청정지대 같습니다.

TV를 켜면 좋든 싫든 거의 매 시간 중계방송을 들어야 합니다. 비슷한 화면이 반복됩니다. 하얀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히 들락날락거리고, 대통령을 위시해 노란 민방위복을 빠짐없이 입은 공무원들이 회의하고, 정수리에 흰 머리가 매일 조금씩 늘어나는 화장기 없는 그 분이 “오늘은 몇 명이 늘었습니다”라며 죄스러운 듯 마이크 앞에 서고…, 국민의 공분을 받고 있는 폐쇄된 그 웅장한 교회, 썰렁한 거리와 시장, 음식점…. 저녁 종합뉴스는 날씨 빼고 이거 하나뿐입니다.

불안의 체감도는 하루가 다르게 커집니다. 그래도 조금은 자신감을 보이던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위기 대응을 심각 단계로 격상하니 더 심란해졌습니다. 한민족이 건국 이래 외국 공항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기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책장 구석에 먼지 앉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인간이 바이러스와 어떻게 사투를 벌여 승리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불안감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통찰을 주는 책이 필요했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이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1976년 영국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세기적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를 아실 겁니다. 그가 창조한 ‘밈(meme)’ 이론은 참 대단했지요. 도킨스는 인간의 의식과 문화 속에서 복제되는 문화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사상이나 종교나 패션 건축 전통 같은 거죠, 인류 문화는 결국 이 밈이 끝없는 모방과 변화를 통해 이기적으로 자기복제해 나가면서 진화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밈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1세대 컴퓨터 천재로 불린 리처드 브로디라는 사람인데 엠에스 워드(MS-Word)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1996년 ‘마인드 바이러스’(원제 ‘Virus of the Mind’, 2010년 국내 출간)라는, 역시 괄목할 만한 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도 바이러스 현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바이러스도 사람 사이에 침투해 사고방식과 행동에 변화를 미친다고 했지요.

미디어의 발전으로 그 바이러스의 침투력은 더욱 강력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온한 마인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매개체가 된다고 했습니다. 마인드 바이러스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프로그래밍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마인드 바이러스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변변찮은 이 글을 끄적거리다 보니 어느덧 창문을 때리던 봄비 소리도 잦아들었습니다. 네, 사스도, 신종플루도, 메르스도 다 지나갔습니다. 또 올 건 오라지요. 그게 인간과 전염병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는 분명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Hoc quoque transibit)! 지금은 힘들고 야속하지만 조용히, 성실한 자세로 지나가길 기다립니다. 가능하면 착한 마인드 바이러스를 퍼뜨리면서요.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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