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벨트를 가다] 숲의 생태계와 어우러진 유기농 커피

입력
2020.02.26 09:00

<23회> 지상낙원, 아티틀란 호수의 커피 농장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티틀란 호수. 영국의 소설가 헉슬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극찬했고, 체 게바라는 혁명의 꿈도 잊게 한다고 말한 아름다운 칼데라 호수다. 최상기씨 제공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티틀란 호수. 영국의 소설가 헉슬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극찬했고, 체 게바라는 혁명의 꿈도 잊게 한다고 말한 아름다운 칼데라 호수다. 최상기씨 제공

며칠 후 동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지상 낙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티틀란 호수(Lago de Atitlan)로 가는 날이다. 아티틀란은 식민시대 수도인 안티구아와, 마야 유적지인 티칼(Tikal)과 함께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과테말라의 관광지다. 대지는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 덕분에 과테말라에서의 일정은 예측이 어렵다. 행여 비가 내릴까 노심초사의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안티구아 읍내를 벗어난 차는 서쪽으로 향했다. 아티틀란은 가장 주목 받는 커피 산지로 떠오르는 우에우에떼낭고로 가는 중간에 있다. 차는 포장된 도로를 달려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산악지형의 굽은 도로가 많아 지도상의 거리에 비해 시간이 꽤 걸렸다. 4시간쯤 달린 차는 파나아첼(Panajachel)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아티틀란 주변의 12개 원주민 마을로 가는 출발지이자, 아티틀란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머무르는 마을이다.

파나아첼은 인구 1만명 가량의 소도시다. 하지만 아티틀란 호수 주변에서는 가장 큰 읍내여서 인근마을 주민들과 장기 체류하는 히피족들 그리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제법 시끌시끌하다. 길거리에는 화려한 색상의 직물과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여기저기 화려한 전통 복식을 한 원주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 아티틀란 호수 주변 풍광을 돌아봤다. 마침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호수의 표면 고도는 1,562m지만 주변에 세 개의 큰 화산에 둘러싸여 있어 그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산 페드로, 톨리만, 아티틀란 등 3,000m가 넘는 세 개의 화산이 근위병처럼 호수를 에워싸고 있다. 호수의 둘레는 120㎞가 넘어 백두산 천지의 14배쯤 된다. 마치 호수는 바다로, 건너편으로 멀리 보이는 고봉들은 섬처럼 느껴진다.

약 8만년 전에 생긴 아티틀란 호수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내뿜어진 마그마가 차 있던 공간이 붕괴하면서 생긴 칼데라 호수다. 독일의 탐험가 훔볼트와 영국의 소설가 헉슬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극찬했다. 26세에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과테말라에서 총을 들었던 체 게바라가 남긴 말도 유명하다. 그는 과테말라 출신의 첫번째 부인 일다 가데아와 결혼한 후 새로운 혁명에 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아티틀란 호수 주변에 머물렀다. 게바라는 일다에게 아티틀란은 혁명가의 꿈도 잊게 한다며 호수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 이 말은 지금까지 아티틀란을 찾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톨리만 화산(Volcan Toliman) 아래의 커피 농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야 한다.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바람이 강하다. 이 바람으로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파도를 만들고 물결은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주로 늦은 아침과 이른 오후에 부는 이 강한 바람을 쇼코밀(Xocomil)이라 부른다. 우리말로 죄를 씻어 내리는 바람이란 뜻이다.

거칠게 일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달리던 보트는 40분쯤 뒤 호숫가에 멈췄다. 파추흐(Pachuj) 커피 농장의 농장주인 안드레스씨가 넉넉한 웃음으로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파추흐의 의미를 묻자 토착 원주민 언어로 ‘안개와 숲이 만나는 곳’이라고 설명해줬다. 호수 연안으로 습도가 높고 지형의 높이가 다양한 이 지역의 마이크로 기후가 자주 안개와 구름을 만든다고 덧붙였다.

안드레스씨가 운전하는 픽업 트럭을 타고 톨리만 산의 좁고 가파른 경사면을 거침없이 올랐다. 농장 입구에서 1,600m를 가리키던 고도계는 농장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오르자 1,850m까지 이르렀다.

호수 주변의 농장들은 트레디션 아티틀란이라는 지역 브랜드를 가진 커피들을 생산한다. 이 곳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농장들이 많다. 평균 농장 면적은 0.5에이커(ac, 약 600평) 정도로 1년에 1,400㎏의 커피를 생산한다. 하지만 파추흐 농장은 언덕을 몇 개씩 지나도록 숲과 농장이 계속 이어질 만큼 규모가 컸다. 커피 농장이 보이는가 하면, 곧 울창한 숲이 나타나고, 또다시 커피 나무들이 이어지는 형태로 숲과 농장은 혼재돼 있었다. 왜 커피 농장을 띄엄띄엄 개간해 놓았는지 궁금했다. 안드레스씨는 소유한 땅의 30% 정도에만 커피를 심고, 나머지는 삼림보호 구역으로 남겨두었다고 설명했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농업은 지속가능한 경작이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많은 생산 비용을 유발시킨다고도 덧붙였다.

자연의 산물인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은 자연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토양, 물, 생물 다양성, 기후, 그리고 생태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상호 작용들이 모두 자연 자원이다. 커피는 삼림 보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물 중 하나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란 단어가 유독 커피 경작에서 많이 불려지는 것만 봐도 삼림과 토양, 물과 생명체들 사이의 균형이 커피 재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아티틀란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농장주인 안드레스씨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셨다. 지상낙원의 자연과 그 자연이 만들어낸 커피 맛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상기씨 제공
아티틀란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농장주인 안드레스씨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셨다. 지상낙원의 자연과 그 자연이 만들어낸 커피 맛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상기씨 제공

안드레스씨는 커피 나무 아래의 검고 부드러운 흙을 손으로 파서 냄새를 맡아 보라고 내밀었다. 화산재 토양인 안티구아의 흙과는 완전히 달랐다. 커피와 함께 심은 차광나무의 낙엽이 썩어 검게 변한 다공질의 부엽토는 미생물 등 유기 물질이 풍부해 커피의 생육에 많은 영양소를 공급한다. 경제적으로는 값비싼 비료 사용량을 줄이고, 토양의 수분을 조절함으로써 관개 요구량을 줄여준다. 토양을 잘 결합하게 하여 가파른 경사지에서도 침식과 산사태의 위험을 낮추고, 땅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 온도 변화로부터 커피 나무를 보호한다.

브라질에서 본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은 환경적 측면에서 결코 자연친화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커피 경작과 삼림 벌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고, 땅은 커피를 얻는 대신 숲 속 생태계를 잃었다. 브라질의 대표적 커피 산지 중 하나인 세하도는 원래 관목과 숲으로 덮였던 지역인데, 지금은 자연 삼림이 20%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 커피나 사탕수수, 콩 등의 작물이나, 목축을 위한 초지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곳 아티틀란 호수 주변의 안드레스씨 농장은 숲을 그대로 유지한 채 중간 중간의 산지에 커피를 경작해 숲과 어우러지게 하고 있었다. 또한 커피나무 사이로 적절한 차광나무를 심어 지력을 유지하고, 숲의 생태계와 이어지게 했다.

삼림이 있는 곳의 커피 농장은 병해충 구제 측면에서도 안정적이다. 작은 곤충들은 해충을 잡아먹어 커피나무를 보호하고, 숲 속의 새들은 곤충들을 먹이로 한다. 다양한 새들이 살고 있는 농장은 그 자체로 생물 다양성과 균형 잡힌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농장은 생태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숲과 별 차이가 없다. 안드레스씨가 보여준 동영상에는 어슬렁거리며 커피나무 사이를 오가는 퓨마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숲과 농장의 경계가 없다는 얘기다.

농장을 내려오는 길에 중간중간 놓여있던 양봉 통이 눈에 띄었다. 꿀벌들은 하얀 커피나무 꽃을 주로 모으지만, 커피 꽃이 피지 않을 때는 숲 속의 다른 꽃에서 꿀을 딴다고 한다. 이 농장은 1년동안 에이커 당 125파운드(약 57㎏)의 꿀을 수확한다. 커피나무는 대개 자가수분을 하지만, 벌 등 곤충들의 수분이 더해질 경우 커피 생산량이 25%가량 증가한다. 양봉을 통해 좋은 꿀도 생산하지만, 커피 수확량도 늘릴 수 있어 일거양득인 셈이다.

농장을 내려온 뒤 아티틀란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 안드레스씨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셨다. 시원한 바람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무엇보다 향긋하게 피어 오르는 커피향은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이곳일 것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대자연과 조화롭게 융화해 대자연의 물과 흙, 미세한 생명체와 다양한 동식물이 만든 커피. 그 한 잔의 커피 안에는 호수가 만들어낸 안개와 수없이 많은 벌레들의 움직임, 벌꿀의 달콤함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까지 모두 담겨있는 듯했다.

체 게바라가 아티틀란에서 혁명의 꿈을 잊었다고 했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커피 향과 며칠 더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파나아첼로 돌아오는 보트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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