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제로(0) 금리’ 시대

입력
2020.03.18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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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낮춰 0%대 금리 목표가 설정됐음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낮춰 0%대 금리 목표가 설정됐음을 밝히고 있다. 뉴스1

1997년 외환위기 전만 해도 금리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기업 활동과 투자가 왕성했던 만큼 수요에 비해 늘 공급자금이 부족했던 탓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초 국고채 3년 금리는 연 12%가 넘었다. 1995년 당시 고 최종현 전경련 회장은 홍재형 경제부총리에게 “시중금리가 14%를 넘을 정도로 치솟고 있다. (금리가 이렇게 높으면)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약화할 우려가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시중금리가 1%를 간신히 넘는 요즘과 비교하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다.

□ 당시 고금리를 전혀 겁내지 않고 돈을 마구 빌려 쓴 기업인이 바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다. 그 무렵 당초 예산 1,900억원 규모의 당진제철 B지구 공사까지 2조4,000억원 규모로 팽창시킨 그는 시중은행장들을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일으킨 막대한 대출을 설비 투자에 들이부었다. 나중에 청문회 때 국회의원들이 “대체 뭘 믿고 돈을 겁 없이 빌려 썼는가”라고 묻자, 정 회장의 대답은 이랬다. “앞으로 세계화하고 자본 국경 열리면 금리는 곧 내려갑니다. 2~3%면 됩니다. 그러니 지금 돈 빌려 그때 갚으면 그만큼 남는 장사 아닙니까.”

□ 무모한 정 회장이었지만, 저금리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외환위기 직전 5.25%였던 기준금리는 2001년 3월부터 4%대로 낮아졌고, 2008년 금융위기 때만 빼면 2014년 4월 이래 항상 2%를 밑돌았다. 3년물 국고채 금리 역시 외환위기 전 9% 이상이었던 게 지난해 4월 현재 1.4% 정도로 낮아졌다. 금리가 낮아지면 시중에 자금이 풍부해진다.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기가 쉬워지고, 가계 역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 사기가 쉬워진다. 그러니 불황이 닥치면 중앙은행은 가장 먼저 금리부터 낮추는 것이다.

□ 문제는 금리를 낮춰도 돈이 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본은 이미 1990년대 장기 불황 때 제로(0) 금리 정책을 감행했지만 국내 투자나 소비를 살리진 못했다. 지금 우리 경제도 비슷한 처지다. 반도체 등 몇몇 업종을 제외한 주력산업 대부분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해 투자를 주저하는 상태다. 자영업자들도 워낙 경기가 안 좋으니 돈을 융통할 길이 있어도 사업 확장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은이 최근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제로 금리 시대를 열었지만, 좀처럼 경기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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