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물이 ‘즐길거리’라는 사법ㆍ입법부

입력
2020.03.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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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위 회의록엔 “청소년 그런 짓 자주”… 딥페이크 음란물, 예술작품 빗대기도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20대 남성 A씨가 19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20대 남성 A씨가 19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자기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다.”(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 그런 짓 자주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과 사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달 3일 법사위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고받은 발언들이다. 취약한 피해자들을 디지털 공간에서 집요하게 성착취한‘텔레그램 n번방’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격한 양형 기준을 설정해 달라’는 국회 청원이 제출되자, 이를 성폭력 특례법에 반영할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물을 “예술 작품”에, 성범죄물 제작과 시청을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짓”에 빗댔다.

본보가 22일 확인한 국회 법사위 제1소위 회의록에 따르면, 성폭력 특례법에 대한 논의 도중 ‘딥페이크(인공지능 기술로 가짜 영상·음성을 만들어 내는 행위ㆍDeepfake) 기술’을 활용한 음란 영상물 제작 처벌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유명인 혹은 지인의 얼굴을 교묘하게 합성한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은 유포나 영리 목적이 확인되지 않으면 피해자의 인격을 살해하는 행위임에도 마땅한 처벌 조항이 없다.

3일 법사위 회의의 쟁점은 ‘유포할 목적이 아니어도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을 처벌할 수 있는지’였다. 채이배 민생당 의원과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유포 목적과 상관 없이 피해자의 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처벌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소수 의견이었다. ‘유포 목적이 확인되지 않으면 처벌은 과하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다.

속기록을 보면, 성범죄 처벌 법안을 만드는 입법부와 성범죄 처벌을 집행하는 사법부의 후진적인 성인지 감수성이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검사 출신인 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은“내가 자기 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처벌로) 갈 거냐”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물 때문에 누군가는 목숨을 끊는데도 ‘즐기는 대상’으로 치부한 것이다. 역시 검사 출신인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극단적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 혼자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다”고 했다. 디지털 음란물 제작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무고한 행위’로, 엄연히 존재하는 피해자를 ‘없는 존재’로 취급한 발언이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법무부의 뒤떨어진 인식도 거듭 확인됐다. 김오수 차관은 “(청소년들이) 유명인들 갖다 놓고 혼자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라고 했다. 가해자의 비뚤어진 성욕은 두둔하고 피해자의 고통엔 눈 감은 발언이었다.

이날 법사위 참석자들의 발언은 ‘법리적’으로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 속에 피해자의 고통은 지워져 있다. 디지털 성범죄가 날로 잔혹해지는 것은 가해자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해당 속기록은 ‘가해자만 보호받는 구조’를 거듭 확인시켰다. 이 같은 가해자 중심적 사고가 ‘텔레그램 n번방’에 거액을 내고 입장해 성착취 영상물을 관람한 26만명의 ‘괴물’들을 만들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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