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원 산불, 정부구상권에 피해 주민 속 탄다

입력
2020.03.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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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4월 강원 속초시 장천마을 인근에서 한 주민이 화재 현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한호 기자
지난 해 4월 강원 속초시 장천마을 인근에서 한 주민이 화재 현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한호 기자

지금 온 세상이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여파로 지난 해 4월 수많은 이재민을 발생시킨 강원도 고성ㆍ속초 지역 산불 피해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관심도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산불로 생활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추운 겨울을 임시 주거용 컨테이너에서 지냈는데, 이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산불 피해가 발생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피해 보상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설악산 자락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동해안 지역까지 번져 지역주민에게 막대한 재산적 피해와 정신적 고통을 발생시켰다. 이에 산불 발생의 원인 제공자인 한국전력과 피해 주민들이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 그리고 이를 중재하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3주체는 합리적이고 신속한 권리 구제를 위해 특별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오랜 진통 끝에 피해 보상에 대한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정부는 당시 산불 피해 지역에 대해 지원한 보조금에 대해 재난안전법의 규정에 따라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한국전력에 구상권을 행사하면 한국전력은 그 금액만큼 보상 금액에서 공제 후 지급해야 하므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재민에게 돌아간다. 또한 정부는 구상권 행사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한국전력은 합의된 피해 보상금 지급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당시 정부는 공사를 반대했던 주민과 시민단체들에게 공사 지연으로 인한 손해액을 회수하겠다고 소송을 제기했다가 철회했던 사례가 있다. 당시 정부는 소송으로 인한 갈등과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회수 금액보다 더 크다고 인식하여, 원인자 부담원칙의 법리를 뛰어넘는 고도의 정책적 판단으로 이 사안을 갈등 없이 매듭지을 수 있었다.

또한 2018년 옛 전남도청을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중 5ㆍ18 민주화운동 흔적이 손상되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 등이 건물 복원을 촉구하면서 점거 농성을 벌였다. 이 당시에도 정부는 준공 지연에 따른 손해액을 시민단체에 돌려받겠다고 소송을 제기하려 하였지만,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판단으로 철회한 바 있다.

이번 고성 산불의 경우도 근본적으로는 위 사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위 지역에는 여러 비상대책위원회가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으며, 피해 보상 절차가 지연됨으로써 이재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최근에는 고소ㆍ고발의 형사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만일 정부가 법이 정한 바에 따른다는 명분으로 구상권을 행사하게 되면 그로 인한 실제 피해는 이재민들이 입게 된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사회적 갈등의 심화는 어떠한 피해보다도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더 이상 보상 절차가 진행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의한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기대해 본다.

이일세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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