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화면 뒤의 평범한 얼굴들

입력
2020.03.28 04:3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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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빠가 컴퓨터를 사 왔다. 입이 벌어진 채로 컴퓨터가 조립되는 과정을 바라보던 나에게 아빠는 곧 컴퓨터로 숙제를 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말했다. 밀린 일기를 생각하며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컴퓨터를 켰다.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므로 주로 바탕화면을 드래그 해 점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을 줄였다 늘였다 하며 놀았다. 흥미가 떨어지면 바탕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분쯤 지나면 화면보호 모드가 실행되었고 끝없이 반복되는 화면보호기를 질릴 만큼 보고 난 후에는 컴퓨터를 껐다.

내가 컴퓨터로 할 줄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었을 때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한컴 타자 연습을 배웠고, 어느 정도 타자가 늘었을 때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타자 연습을 하기엔 채팅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다. ‘별 헤는 밤’을 빠르고 정확하게 치는 것은 지루했지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한 타자는 흥미로웠고 덕분에 내 타이핑 실력은 정말로 늘었다.

어느 날의 채팅에서 동갑 남자애를 만났다. 서로 이름을 소개한 뒤 30분쯤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애는 만나서 같이 놀자며 우리 집 주소를 물었다. 나는 별 의심 없이 집 주소는 물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다. 채팅을 종료한 후에는 하루도 안 지나 그 일을 몽땅 잊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웬 성인 남자였다.

“혹시 강이슬 집 맞나요?”

“네 맞아요. 제가 강이슬이에요. 누구세요?”

“아.. 우리 채팅에서 만났는데 혹시 제 아이디 기억하세요?”

며칠 전 채팅을 나누었던 남자 애의 아이디였다. 혀끝부터 목구멍 전체가 빳빳하게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슬이랑 채팅했던 애가 내 동생인데. 동생이 창피하다고 나더러 대신 만나서 놀아 달라고 해서 전화를 했어.”

겁이 나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우리 집 주소를 아는 그 남자가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남자의 말이 진심일 수도 있겠다고, 그랬다면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나쁜 아저씨라기엔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잊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놀이터 벤치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남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남자,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남자,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 마주치는 모든 남성이 평범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 그 남자일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낮의 불안은 죄책감이 되어 밤을 휘저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멍청해서, 그러지 말 걸, 부모님이 아시면 어떡하지. 그 어린 나이에 잠을 설치는 여러 밤을 보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그때의 나처럼 어린 미성년자들이 텔레그램에서 노예 취급을 받으며 성을 착취당했다. 아이들이 지옥보다 끔찍한 오늘을 산 뒤, 찾아올 아침을 두려워하며 뒤척였을 숱한 밤을 생각하며 가슴 졸였다. 그 시간들을 만든 가해자들의 낯이 궁금했다. 파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킬킬댔을 26만의 평범한 얼굴들.

N번방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때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날이 불현듯 떠올라 아찔하고 서글펐다.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길을 걸을 때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는 아직도 그 남자의 평범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생생하다. 이것은 얼마나 오래도록 공감되어야 하는 공포일까. 왜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걸까. 성범죄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본인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생히 동감하는 여성들의 현재는 슬프고 끔찍하다. 여성들이 성범죄를 본인의 감각과 경험으로 공감하지 않을 날이 오기는 할까.

강이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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