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친부의 성폭행도 감싸줬던 남편인데, 곁에 있어도 외로워요

입력
2020.04.27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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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엄격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은 장녀인 저에 대한 기대가 컸고, 저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명문대를 나와 높은 연봉을 받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 사랑 받으면서 살지만, 저는 너무 불행하고 외롭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정이 파탄 날까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그런 짓을 하진 않았지만, 본인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저와 동생들에게 기준도 없이 매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성공과 실패를 본인의 성공과 실패라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몸이 아파 학원을 쉬고 싶다고 하면 “쓰러져도 학원에서 쓰러져”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이 상담하는 것을 보고 ‘그래 내가 아니라 우리 부모가 잘못한 거야’라며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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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가며 독립했지만, 아버지는 중3이던 여동생에게도 손을 댔습니다. 저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가족 어느 누구도 제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네 아빠 감옥가면 동생들 학교는 어떻게 보낼 거냐” “소문나면 학교도 못 다니게 될 텐데 책임 질 거냐”라 했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동네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냐”고 했고, 이모는 “네 엄마 이혼하면 어떻게 사냐”라고 했지요.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능력이 없었어요. 지금의 남편이 당시 저와 동생을 다 책임지겠다고 방도 구해줬지만, 어머니가 그러면 자살하겠다 하는 바람에 포기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동생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어머니는 동생을 한동안 방안에 가두더니 나중에는 아버지과 단 둘이 있도록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

미칠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저를 보듬어준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저희 집 상황을 판단하기보다 묵묵히 저를 돌봐줬습니다. 남편은 아버지와 달리 술을 싫어하고, 허세 부리지 않고, 논리적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하고 속도 깊어요.

하지만 그가 저를 외롭게 합니다. 기념일 챙기기나 이벤트 같은 걸 잘 못합니다. 해달라고 하면 “네가 하고 싶어서 해준 것은 선의로 끝내고 하기 싫은 나에게 강요하지는 마”라고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나 영화도 다릅니다.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니 안 좋아하는 영화도 같이 봐줄 수 없느냐”고 하면 그는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려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은 자거나 휴대폰만 봅니다.

남편은 제게 안정과 편안함을 주고,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준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과 함께 있는 게 왜 이토록 불행하고 외로운 걸까요.

김소희(가명ㆍ30ㆍ회사원)


소희씨, 당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은 어쩌다 겪는 불행이나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절대로 겪어서는 안될 일이었고, 아주 끔찍한 범죄였어요. 당신은 잘못한 게 단 하나도 없었어요. 당신은 그 고통을 잘 버텼고, 당신 안에 건강하고 단단한 면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상처가 깊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버텼다고 말하지만 가슴이 시리고 아픕니다.

당신은 부모로부터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어요. 누구로부터 태어나는가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고 슬프지요. 어렸을 때 겪어선 안될 일을 겪게 돼 생긴 상처,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떻게 부모가 돼서 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모를 수 있을까’라는 섭섭함이 생기고, 섭섭하다 못해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줘야 할 아버지가 당신을 성적으로 무참하게 공격했어요.

당신의 아버지에게는 분노라는 표현도 약합니다. 아버지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거고, 당신이 만약 그렇게 느낀다면,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얼마나 혼란스럽고, 공포스러웠을까요.

성폭행은 살인에 견줘도 될 만큼 가장 끔찍한 폭력이에요. 그 상대가 당신을 보호해야 할 아버지였다면 당신이 느끼는 분노와 적개심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소매치기나 접촉사고를 당해도 한동안 그 공포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운데, 그런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지내며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그 시간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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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만큼이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도 컸을 거에요. 아버지처럼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당신이 어떻게 내 엄마야’라고 따져 묻고 싶었을 거예요. 아버지의 성폭행보다 더 큰 상처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일 수 있어요. 당신의 심정을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어머니에 대해 화가 나다 못해 절망스러웠을 거예요.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어린 당신을 보호하지도 못했고, 그 이후 마음의 상처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남편이 친딸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웠겠지요.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겠지요. 그 두려움과 수치심은 어린 딸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측면이 커요.

어머니는 남들로부터 ’아빠가 딸에게 어떻게…’ ‘엄마는 도대체 뭘 했냐’같은 말을 듣기 싫어서,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그 순간을 외면해버렸어요. 사람들의 질타, 수군거림, 체면, 수치심, 미래에 대한 걱정, 경제적 문제 이런 것은 다 제쳐두고 오직 상처받은 딸만 생각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자식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한 거지요. 그래서 필사적으로 당신에 대해 잘 키웠다는 얘기를 들으려고 했을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가정, 공부 잘 하는 딸로 고통과 절망을 덮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런 어머니를 보는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런 어머니에게 당신이 반항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아버지에게 공격받은 당신으로선, 어머니가 비록 튼튼하지 않은 동아줄이라 해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어머니한테까지 버림받으면 살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동생마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당신의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예요. 다른 가족조차 외면해버린 현실에 당신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너무나 가엾습니다. 어린 당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도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고 정말 필사적으로 열심히 살았을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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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당신에게 유일하게 힘이 돼주고, 당신을 비난하지 않았던 사람이 남편이었을 거예요.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남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요,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절대로 넘지 않습니다. 남편은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닐지 몰라도 당신의 가장 큰 고통은 절대 건드리진 않을 거예요.

그런 남편과의 갈등이라면, 아마 당신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았어야 할 사랑과 존중, 신체적ㆍ정서적 보호를 받지 못한 데서 생긴 마음의 결핍이 건드려지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내면의 커다란 구멍 같은 결핍을 남편으로 채우고 싶을 거예요. 오랫동안 당신의 유일한 보호자였으니까요.

당신의 고통스럽고, 분하고, 처절하리만큼 슬펐던, 그런 시절을 떠올려보면 당신에게 자상하고, 다정한, 긍정적인 마음의 교류와 감정소통이 얼마나 절실할까요. 당신이 남편에게 받고 싶은 게 바로 그겁니다. 남편이 당신을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줄 때 당신 내면의 구멍이 조금씩 채워지는 충족감이 드는 거지요.

물론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변함없이 당신의 곁을 지키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당신의 감정적 구멍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하진 못한 거지요. 그럴 때 당신은 그간 꽁꽁 묶어두었던, 어릴 적 고통스러웠던 수많은 감정들이 건드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넘어 더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는 거예요.

소희씨, 당신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당신 내면에 어떤 감정들이 건드려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남편에게 잘 알려줘야 합니다. 어쩌면 남편은 당신이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소희씨가 “당신이 그렇게 해준다면 내가 가진 결핍의 구멍에 한 겹 도포를 덮어주는 것”이라거나 “내가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길 해보세요. 그리고 “내게 상처 준 사람이 당신도 아닌데, 당신에게 노력해달라 해서 미안해”라고 덧붙인다면, 당신의 남편은 더 없는 사랑과 지지를 보낼 겁니다. 이 글을 남편과 함께 보는 것도 좋겠네요. 꿋꿋하게 버텨온 당신의 용기에 소희씨의 삶을 존중하는 저의 진심을 담아 격려와 위로를 보냅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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