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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ㆍ사우디 유가전쟁에 국제정치 판세 흔들
美, 셰일가스 폭락으로 에너지 독립 타격
산유국 3국전쟁에 中만 이득보는 아이러니
©게티이미지뱅크

원유가격 폭락이 국제정치판을 소리 없이 바꾸고 있다. 사우디, 러시아, 미국 3대 산유국의 시장쟁탈전이 치열하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가격전쟁에 돌입하자, 미국 셰일산업이 벼랑으로 몰린다.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아래에 머물고 있으면 대부분 셰일업체는 문을 닫아야 한다.

미국의 에너지 독립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셰일이다. 지난해 미국 국내 원유 생산의 63%가 셰일이었고, 해외 순수입은 제로였다. 몇 년 전 ‘셰일혁명과 미국없는 세계’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은 셰일을 ‘게임체인저’라 불렀다. 셰일이 미국의 에너지 독립을 가져다 주어 국제정치판을 뿌리째 바꾼다는 것이다.

원유는 지금도 전략물자다. 1980년 120달러대에 있던 유가가 1986년 32달러대로 내려앉은 것이 소련 붕괴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였다고 한다.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에너지 독립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석유가 필요하지 않으면 전쟁과 테러가 이어지는 중동에 매여 있을 이유가 없다. 싫어하는 사우디 왕정을 껴안고 있지 않아도 된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철수해도 그만이다. 시리아 내전에 뛰어들 필요도 없다. 이스라엘을 편들기도 쉽다.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를 제재하는 부담도 적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너지 독립에 강한 애착을 보여 왔다. 취임하자마자, 오바마 대통령이 화석연료를 제한하려고 도입해 놓은 규제를 해제하고, 파리기후협약도 탈퇴했다. 금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의 솔레이마니 장군을 사살한 후 언론회견에서는, “미국은 중동 석유가 필요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사우디ㆍ러시아 사이의 가격전쟁을 중재하러 나선 트럼프 대통령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셰일이 무너지면 에너지 독립도 없다. 당장 11월 대선에도 영향이 온다. 텍사스, 노스다코타 등 주요 셰일 산지는 공화당의 텃밭이다. 이 때문에 평소 관계가 껄끄럽던 푸틴 대통령과 4월 한 달 동안 네 번이나 통화하고, 사우디 언론인 카쇼기를 죽였다고 의심받는 사우디 왕세자와도 수시로 전화를 했다.

원유시장의 난기류가 언제 가라앉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2분기 원유 수요는 30% 줄어들 전망이다. 저장시설이 차오르면서 4월 하순 유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돈을 얹어 주겠다고 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충격이 가신 뒤에도 원유 수요가 회복될지는 불투명하다.

수요 전망이 어려우니, 가격 전망도 안된다. 생산 원가만 따지면 사우디가 10달러 미만으로 가장 싸다. 그러나 사우디는 돈을 써야 할 데가 많다. 미 의회가 사우디와의 안보협력 재고까지 거론하지만, 사우디는 초대형 유조선 18척에 원유를 가득 실어 걸프만으로 보내면서 셰일산업 축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 간다. 키를 쥔 것은 오히려 러시아다. 사우디보다 외환 보유고가 많고 지출은 적다. 미국ㆍ사우디 관계가 나빠지면 중동에서 입지도 좋아진다. 사우디도 러시아도 셰일에 빼앗겼던 시장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강하니, 셰일의 손익분기점까지 가격을 올리는 데는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위기에서 미국 셰일업계는 상당 부분 정리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일부 조정이 불가피할 듯하다. 2017년 12월 미국 국가안보보고서는 러시아를 중국과 함께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미국은 러시아 국영석유회사에 여러 가지 제재를 부과해 왔다. 독일과의 제2가스관 건설도 반대했다. 그러나 이제 셰일업계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의 협조가 절실해졌다. 감산 합의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에게 두 번이나 ‘고맙다’고 트윗을 날렸다.

저유가가 이어질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중국이다. 유리한 조건으로 전략비축 물량을 확대하고 장기 공급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

바이러스가 원유시장을 흔들고 국제정치판을 바꾸는 것이 신기하다. 역사는 우연한 사건이 엮어 나가는가, 아니면 필연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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