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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저는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이 있는 워킹맘입니다. 몇 년 전 딸은 오빠와 심하게 다투고 가출을 했습니다. 하루 만에 돌아오긴 했지만 딸은 그 뒤로 여러 달 동안 아예 입을 닫아버렸어요. 자해를 하고, 자퇴한다며 학교도 자주 빠졌습니다.

겨우 딸을 달래 이유를 캐물으니 딸은 그제서야 어렸을 적 오빠가 친구들과 모여 야한 동영상과 사진을 돌려보다 자기에게도 보여주었고, 잘 때 오빠가 자기 몸을 옷 위로 더듬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중학생이 됐을 때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충격에 빠졌다고 했어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지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남매인데 어떻게든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딸에게 ‘너무 충격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그때 오빠도 어렸으니, 어쩌겠냐’고요. 시간이 좀 지났으니 딸이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딸은 더 심해졌어요. 제가 하는 말에는 비웃거나 대꾸도 하지 않고, 매일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합니다. 자해 행동도 계속하고 있어요. 아들 얘기를 한 마디만 꺼내도 딸은 “엄마는 내가 수십 번 내 앞에서 그 인간 얘기하지 말랬는데 왜 그러는 거냐”며 폭발해요.

제가 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저도 어렸을 때 사촌오빠가 명절 때 자고 있던 제 몸을 만진 경험이 있어요. 너무 끔찍했지만 자는 척 할 수밖에 없었고, 꼼짝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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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은 불행했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늘 병원을 오갔고, 외딴 시골에서 농사 짓던 엄마는 경제적으로 쪼들렸어요. 두 분은 그 작은 동네가 떠나가라 자주 다퉜어요. 억센 어머니는 항상 제게 ‘몸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푸념했고, 친구와 다퉜을 때 어린 제게 직접 그 집에 가서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오라고 시킬 정도로 제게 엄격했어요.

초 3때쯤 콩자루를 들고 탈곡기에 콩을 넣다 자루를 놓쳤는데, 그 순간 혼날까봐 콩자루를 끝까지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탈곡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뻔 했던 일은 충격과 공포, 두려움으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했지만 형편상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에 가서 일을 했어요. 호통치는 선임들 틈에서 매일 울면서 일했습니다. 졸업 뒤 대학생이 너무 부러워 밤에 학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 뒤늦게 대학엘 갔습니다. 대학도 대학생활을 즐기기보다는 남들보다 몇 배나 고생했습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힘썼습니다.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소개로 만난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뒤에도 시험을 쳤고 합격했어요.

결혼생활은 힘들었어요. 경제 능력이 없는 남편은 술만 마셨어요. 제가 사실상 가장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아이들에게 툭하면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곧잘 공부를 잘했고, 저도 그런 아이들을 보며 참고 살았습니다. 이제라도 아들에겐 잘못된 행동이란 걸 일깨워주고, 딸에겐 아들과 대화라고 하라고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진애(가명ㆍ55ㆍ공무원)

저와 연배가 비슷한 진애씨 사연을 읽고 당신의 삶이 공감이 되면서도 매우 안쓰러웠어요. 그 당시는 참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요. 공부를 곧잘 했지만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당신에게 얼마나 속 상했을지 마음이 아픕니다.

진애씨, 당신은 인생의 매 순간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것 같아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스스로 학교에 가고, 일하고, 노력해서 대학엘 갔어요. 장학금을 받았고, 또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됐어요. 인생의 매 단계마다 위기가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더 많은 노력으로 당신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왔어요.

당신은 굉장히 노력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노력 이전에 맞닥뜨렸던 현실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어요. 당신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생긴,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매 순간 들이닥쳤던 것 같아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매번 부딪혀야 했던 그 현실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고, 고통스러웠을까요. 그 때마다 당신은 추락하는 느낌이었을 거에요. 얼마나 무력해졌을까요.

그럼에도 당신은 뒤로 나동그라지기보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왔어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지만 부모를 탓하기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원하는 학교에 가질 못했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끝까지 학업을 이어갔어요. 탄탄한 직장도 구했고요. 오로지 당신의 힘으로요.

자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인생은 강박의 순환이에요. 문제를 계속 반복하게 되지요. 당신은 인생의 고비 때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잘 이겨내 왔어요. 잘 겪어냈지만 당신 내면에는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쌓여온 불안이 있을 거에요. 마치 워커홀릭(일중독자)들이 스스로를 해칠 정도로 과도하게 일을 해야 안정을 찾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안의 잠재된 불안을 낮추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온 것 같아요.

딸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당사자인 딸도 고통스럽겠지만 당신도 그에 못지 않게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엄마인데요. 당신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자녀들의 불행에 절규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려고 뭐든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행, 그 자체가 당신 안에 남아 있는 낮은 자존감을 자극하고 어렸을 때부터 당신 안에 있던 오랜 응어리를 건드렸을 거예요. 분노와 불안이 뒤섞이면서 오랜 세월 당신에게 누적돼 있던 그 한 맺힌 감정들이 한꺼번에 당신을 덮쳤을 거예요. 그 뒤엔 무력감이 남겠지요.

그 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당신은 당신이 위기에 처하면 작동시키는 방어기제처럼,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아마 그게 딸을 설득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안타깝지요. 딸은 설득이 필요한 게 아니었는데, 딸은 보호와 위로가 필요했거든요.

딸의 반응은, 오빠가 해서는 안될 짓을 한 데 대한 극도의 분노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엄마에게 털어놨을 때 당신의 반응에 더 상처를 받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당신은 그럴 마음이 전혀 아니었겠지만, 딸은 죽을 만큼 힘든 얘기를 어렵게 꺼냈는데 엄마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두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자신을 설득하려 든다고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런 엄마에게 섭섭함을 넘어서서 불 같은 화가 났을 거예요. 어렸을 적 당신이 엄격하고 억셌다고 했던 어머니로부터 느꼈던 그 차가움을, 딸도 당신에게서 느꼈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내가 뭘 더 어쩌라는 것이냐’는 무력감을 딸도 느꼈을 겁니다.

당신이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당신 역시 어릴 때 부모로부터 정서적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적다는 것을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식을 온전하게 보호하는 법을 당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딸에게 제대로 처신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당신의 마음이 딸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딸을 너무 사랑하지만 딸이 그걸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지금부터라도 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딸의 편에 서서 딸의 마음을 보듬어야 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우선 딸에게 “네가 겪었던 그 일이 어린 너에게 매우 두렵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는 걸 엄마가 잘 안단다. 그 당시에 널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고, 네가 용기를 내 말했는데도 내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너를 살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얘기하세요. “엄마의 어린 시절도 너무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제대로 살펴보는 그런 경험이 부족했다. 네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안다. 네 마음의 상처가 어쩌면 아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었다. 엄마는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 생각이다”라고 진심을 얘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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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딸의 편에 제대로 서줘야 합니다. 아들을 경찰에 신고해 법적 처벌을 받게 할 순 없어도, 아들을 벌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도 벌을 받고, 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딸은 오빠가 미움의 대상이라면, 부모에 대해서는 보호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와 분노가 클 거예요. 엄마에게 보호받고 싶기도 하지만 동시에 밉기도 할 겁니다. 그런 점을 헤아려 딸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지지하고, 편이 돼줘야 해요. 아들에게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해야 합니다. “네 동생의 고통에 대해 오빠로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하세요. 그리고 딸이 원한다면 둘이 따로 살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애씨, 저는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는지 압니다. 당신이 맞닥뜨려온 삶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도 깊이 공감해요. 딸한테도, 비록 그 방식이 적절하지 못하다 해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고 당신이 애쓰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딸이 크면서 그 때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순 있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은 안 될 거예요.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일도 많거든요.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진심을 잘 얘기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딸이 마음을 열지 않아도, 당신의 진심을 느끼지 못해도, 엄마로서 그냥 그렇게 해야 해요. 딸이 오빠와 끝내 말을 안 하더라도, 그래서 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당신 딸에게 “네가 비록 큰 상처를 받았고, 그리고 그 상처가 회복되지 않더라도 너의 인생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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