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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그 역시 그리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에 철학적 신념으로 인해 자신이 속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학자로서의 활동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의 주요 원고들은 당시에 출간되지 못했으며, 그나마 출간된 책도 특별한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 밖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다가 44세라는 짧은 일기로 타계했다.

그런데 그의 불행은 우리나라에서 다소 기이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스피노자의 문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형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문장은 스피노자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선 마르틴 루터의 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물론 이런 잘못이 오래 이어진 것은 이 문장이 내뿜는 단호한 비장미와 따뜻한 매력 때문이다. 삶의 일상적 노동이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이 엄습할 때 이 문장은 항상 구원처럼 다가와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더구나 여기서 뭔가 지루하고 따분한 인상을 주는 아리스토텔레스라든가 데이비드 흄이 아니라 스피노자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신비한 이름이 선택된 것도 이 잘못된 유행에 큰 이유가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에 더해 스피노자에 또 하나의 잘못된 인용이 추가되고 있으니 곧 “나는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알쏭달쏭한 이 문장 역시 스피노자의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한가로운 말투가 없다. 스피노자가 유리 렌즈를 가는 일로도 한동안 생계를 해결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왜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그가 흙을 파고 나무를 심는 농부의 삶의 문맥에서 호출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저 문장이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은 것 같다. 사과나무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도 우리에게 의미와 위로를 선물한다. 넓음, 정확히 말해 산만함은 우리 일상의 가장 특징적 표지 중 하나다. 무엇인가 검색을 하기 위해 브라우저를 켰다가 여기저기 궁금한 링크들을 눌러 보느라 막상 애초에 무엇을 검색하러 들어왔는지 까맣게 잊는 일은 이제 하나도 새롭지 않다. 내 취향에 맞추어 동영상과 뉴스와 음악과 신상품을 추천해 주는 신비한 알고리즘을 따라 넓게 넓게 쫓아다니다가 문득 창 밖을 보면, 이미 하루 해가 저물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깊이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라는 말로 우리는 때로 위로받는다. 우리가 매번 길을 잃지만, 이것이 무의미한 방황만은 아닐 것이라고 이 문장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산만한 마우스 클릭으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넓게 땅을 파 내려가고 있는 것이기에 언젠가는 세상과 인생의 비밀을 깊게 파헤치는 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산만한 공부가 설마 그냥 흩어지기만 하겠는가. 이런 계통 없는 검색과 노동과 만남이 설마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겠는가. 오늘의 넓이는 내일의 깊이를 낳으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하나의 오래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넓이는 깊이를 지향한다. 넓이가 필요한 것은 깊이 때문이다. 넓이는 자신을 이겨냄으로써 결국 깊이에 도달할 것이다. 깊이는 넓이로 나아갔다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의 학교 교육 현장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시행 중이다. 한 학기 동안 읽어 나갈 책 한 권을 정해서 이에 대해 읽고 쓰거나 토론하고 발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이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 학교의 사정에 따라 실제 이루어지는 수업의 완성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교육 현장에서 진행되는 독서 교육의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겨내야 할 문제들이 없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정화된 추천 도서 목록을 중심으로만 진행될 것이 아니라 최근에 발간되는 우수한 도서들을 고려하면서 시의성과 현장성을 갖춘 도서 목록이 확보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특정 분야나 장르로 책들이 편중되어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학생들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한동안 학생들이 책을 무조건 많이 읽도록 하는 데에 주력했던 적이 있다. 이 과거의 틀로 보면, 한 학기에 한 권을 읽자는 수업의 틀이 얼핏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은 어차피 평생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나누어야 할 것은 독후감 작성법이 아니라 책과 함께 뒹굴어 보는 즐거운 경험이다. 즐거움을 나누려면 오래 같이 있어야 하고 깊게 사귀어야 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의 정신이 형성되는 것은 넓은 독서보다는 깊은 독서에 의해서이다.” 동시대의 문인 플리니우스는 이를 “여러 가지보다는 여러 번!(non multa, sed multum)”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여전히 넓이가 아니라 깊이다.

김수영 철학박사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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