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담뿍, 만경강 감성열차… 문화 듬뿍, 100년 양곡창고

입력
2020.05.12 16:00
수정
2020.05.12 16:4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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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61>완주 삼례읍

삼례읍 비비정 아래 옛 만경강철교의 ‘비비정 예술열차’가 해질 무렵 은은한 경관 조명을 밝히고 있다. 만경강 수로와 전주~군산 간 철도는 일제 강점기 양곡 수탈의 상징이었다. 완주=최흥수 기자
삼례읍 비비정 아래 옛 만경강철교의 ‘비비정 예술열차’가 해질 무렵 은은한 경관 조명을 밝히고 있다. 만경강 수로와 전주~군산 간 철도는 일제 강점기 양곡 수탈의 상징이었다. 완주=최흥수 기자

참 ‘삼례스럽다’. 대한민국에 일제의 수탈에서 자유로웠던 땅이 어디 있을까. 구한말 국권 침탈 이후 그들이 남겨 놓은 도시와 건물이 더러는 근대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고,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마다 이를 정비해 관광지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일본풍’을 앞세운 마케팅이 곱게만 보일 리 없다. 아무리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워도 일본에 대한 열패감이 찜찜하게 남는 게 사실이다. 완주 삼례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삼례는 일제강점기의 유산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그렇다고 애써 부인하지도 않는다. 모든 게 삼례의 역사에 자연스럽게 흡수됐다.

◇수탈의 양곡 창고는 삼례의 문화 창고

삼례는 조선시대 10개 간선도로 중 2곳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땅끝 해남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호남대로가 통과하는 길목이었고, 경남 통영에서 진주 함안 남원 전주로 이어지는 통영대로가 삼례에서 합쳐졌다. 고속도로로 치면 ‘삼례분기점’이 있었던 셈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세 번 예를 갖췄다고 ‘삼례(三禮)’라 했다는 설이 있다. 최근에는 만경강의 옛 이름 ‘한내’가 변해 삼례가 됐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호남평야도 완주에서 발원하는 만경강에서 비롯된다. 삼례에서부터 펼쳐진 평야가 익산과 김제로 광활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자연스레 양곡 수탈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삼례에도 10여개의 대규모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삼례역 인근 후정리에 자리한 삼례문화예술촌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인 대지주 시라세이가 1926년 설립한 이엽사농장 창고다. 이 농장은 완주 지방의 다른 농업 회사인 전북농장, 조선농장, 공축농원과 함께 식량 수탈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옛 일본인 농장 건물을 미술관, 카페, 전시실로 활용한 문화공간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옛 일본인 농장 건물을 미술관, 카페, 전시실로 활용한 문화공간이다.
삼례역 인근 삼례문화예술촌의 옛 농협 창고는 현재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삼례역 인근 삼례문화예술촌의 옛 농협 창고는 현재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양곡창고를 개조한 삼례문화예술촌의 모모미술관 내부. 현재 비를 주제로 한 수묵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옛 양곡창고를 개조한 삼례문화예술촌의 모모미술관 내부. 현재 비를 주제로 한 수묵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양곡 창고였던 삼례문화예술촌의 디지털아트관 외벽이 담쟁이 넝쿨에 덮여 있다.
양곡 창고였던 삼례문화예술촌의 디지털아트관 외벽이 담쟁이 넝쿨에 덮여 있다.

1920년대에 지어진 양곡 창고는 광복 이후인 2010년까지 사용됐다. 저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능을 잃은 창고는 한동안 방치되다가 2013년 완주군에서 매입해 삼례문화예술촌으로 재탄생했다.

외관은 세월의 때가 그대로 남아 허름하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단장해 미술관과 카페, 공연장, 책 공방과 목공소로 활용되고 있다. 모모미술관으로 들어서면 현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쌀 가마니의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엇갈리게 벽에 댄 편백나무 원목이 설치미술처럼 장식돼 있고, 천장의 목조 트러스 구조물도 그대로 드러내 공간감을 극대화했다. 현재 비를 주제로 한 대형 수묵화와 설치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디지털아트관은 가상현실(VR)로 예술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명화와 현대기술을 접목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바로 뒤의 ‘카페 뜨레’ 역시 목조건물 특유의 향기와 클래식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좌석을 다양한 형태로 배치했고, 건물 한쪽에는 길게 창을 내 바깥의 연못을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옛 농협 창고는 멋진 공연장으로 변신했고, 바로 옆 김상림목공소에서는 다양한 생활 가구와 소품을 만날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카페 ‘뜨레’ 내부. 옛 창고의 편백나무 목재를 그대로 살렸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카페 ‘뜨레’ 내부. 옛 창고의 편백나무 목재를 그대로 살렸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카페 ‘뜨레’ 내부. 옛 양곡창고의 목재를 그대로 살렸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카페 ‘뜨레’ 내부. 옛 양곡창고의 목재를 그대로 살렸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책 공방의 현수막. ‘기록하지 않는 삶은 사라진다’는 문구 자체를 시각화했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책 공방의 현수막. ‘기록하지 않는 삶은 사라진다’는 문구 자체를 시각화했다.
삼례문화예술촌의 김상림목공소. 갖가지 생활 가구와 소품을 제작ㆍ판매한다.
삼례문화예술촌의 김상림목공소. 갖가지 생활 가구와 소품을 제작ㆍ판매한다.
삼례성당은 삼례문화예술촌과 붙어 있다. 고딕양식 붉은 벽돌이 예술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삼례성당은 삼례문화예술촌과 붙어 있다. 고딕양식 붉은 벽돌이 예술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맞은편의 책 공방은 오래된 인쇄기기를 전시하고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공방은 완주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건물 외벽에 걸린 ‘기록하지 않는 삶은 사라진다’라는 현수막은 글자가 점점 희미해지게 디자인해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책 공방은 지난해 60세 이상 된 완주 주민의 삶을 기록한 ‘인생보’를 펴냈다. 지역민이 콘텐츠이자 주인공인 기록이다.

문화예술촌은 바로 옆 삼례성당과 담장 없이 연결된다. 삼례에 천주교가 유입된 건 1902년으로 알려졌다. 처음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초가 공소로 운영되다 1955년 현재의 번듯한 고딕양식 건물이 지어졌다.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성당이지만, 붉은 벽돌이 주는 안정감과 단아함이 삼례문화예술촌과 잘 어울린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삼례책마을’도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시설이다. 특히 고서와 기록, 수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외벽은 철이 산화한 질감을 살린 함석이지만, 내부는 2층까지 트인 목조 구조물에 중고 서적으로 가득 찼다. 한 권에 3,000~1만원에 팔고 있는데, 헌 책이라고 해서 상태가 불량하거나 값어치가 떨지는 건 아니다. 서울의 대형 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들이 수두룩하다. 지식 창고에서 잠시나마 책 냄새에 푹 파묻히는 것도 좋겠다.

서점 옆 박물관은 한 해 두세 차례 기획전시를 연다. 시골의 작은 책방이라고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박대헌(67) 이사장이 중학생 때부터 수집해 온 희귀 기록과 인쇄물을 전시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물이다.

삼례책마을 외벽은 산화한 함석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
삼례책마을 외벽은 산화한 함석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
삼례책마을 역시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건물이다. 서고 위로 목재 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삼례책마을 역시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건물이다. 서고 위로 목재 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옛 국민학교 교과서가 전시돼 있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옛 국민학교 교과서가 전시돼 있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송광용 만화일기 40년’. 아마추어 만화가의 개인 기록이자 역사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송광용 만화일기 40년’. 아마추어 만화가의 개인 기록이자 역사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송광용 만화일기 40년’. 군 복무 시절에도 꾸준히 그림일기를 쓴 집념이 놀랍다.
삼례책마을 박물관에 전시 중인 ‘송광용 만화일기 40년’. 군 복무 시절에도 꾸준히 그림일기를 쓴 집념이 놀랍다.

현재 ‘시집 연애보’를 전시 중이다. 1942년 송기화(1920년생)씨가 남편 박상래에게 넉 달가량 쓴 미발표 연애시다. 아주 사적이지만 시대상을 엿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철수와 영이-김태형 교과서 그림’과 ‘송광용 만화일기 40년’ 역시 지난 시간의 한 토막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옛 국민학교 교과서의 주인공 ‘철수와 영희’가 1960년대 이전에는 ‘철수와 영이’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송광용(1934~2002)씨는 1952년부터 40년간 만화 형식으로 일기를 써 온 아마추어 작가다. 활자를 인쇄한 것처럼 정교한 글씨와 그림도 놀랍지만, 엄혹한 시절 군대에서도 빠지지 않고 만화일기를 써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림 한 장 한 장이 개인의 기록이자 대한민국의 역사다.

박 이사장은 이 정도 전시관 10개는 채울 만큼 희귀한 기록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니 삼례책마을 박물관이 어떤 전시물을 내놓을지 앞으로 더 기대된다.

◇날아갈 듯 비비정(飛飛亭)에 기러기 대신 감성열차

삼례문화예술촌에서 직선거리 1km 남짓한 만경강가에 비비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높지 않은 강 언덕에 자리 잡아 살짝 들린 추녀 끝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하다. ‘날 비(飛)’ 자를 두 번이나 써서 어감마저 경쾌한데, 정자 이름을 지은 내력을 보면 다소 비장하다.

비비정은 1573년(선조6)에 무인 최영길이 별장으로 지었다. 후에 그의 손자 최양이 당대의 문인 송시열에게 정자의 기문을 부탁하는데, 이때 송시열이 중국의 명장 장비와 악비에서 두 글자를 따 비비정이라 명명한다. 최씨 가문이 대대로 용맹과 충효를 중시하는 무인 집안이라는 이유였다. 바로 앞 강변 모래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했다.

삼례 만경강가의 비비정. 이름처럼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하다.
삼례 만경강가의 비비정. 이름처럼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하다.
비비정 아래로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수로가 지나고 있다. 만경강 상류 대아저수지의 물을 호남평야에 끌어대는 물길이다.
비비정 아래로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수로가 지나고 있다. 만경강 상류 대아저수지의 물을 호남평야에 끌어대는 물길이다.

지역에서는 여전히 비비낙안을 완주8경으로 치지만 실제는 이름뿐이다. 그 옛날 만경강이 호남평야를 적시며 유유히 서해까지 흐를 때는 강변 곳곳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하류에 수문과 보를 설치하고 강을 직선화하면서 주변은 무성한 수풀로 뒤덮였다.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려들 때는 어종도 다양해 불을 밝히고 강을 오르내리는 고깃배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지만, 지금은 낚시꾼들에게 잉어와 붕어 정도만 걸려든다고 한다.

비비정 아래 옛 만경강철교 위에 ‘비비정 예술열차’가 얹혀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 노을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비비정 아래 옛 만경강철교 위에 ‘비비정 예술열차’가 얹혀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 노을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비비정 아래 새 만경강철교 위로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기러기 내려앉는 비비낙안 풍경 대신 보름달이 수면에 비치고 있다.
비비정 아래 새 만경강철교 위로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기러기 내려앉는 비비낙안 풍경 대신 보름달이 수면에 비치고 있다.

일제강점기 만경강 수로와 전주~군산간 철도와 도로는 삼례 식량 수탈의 주요 수단이었다. 지금은 비비정을 가운데 두고 2개의 철교가 강을 가로지른다. 왼쪽은 전라선 직선화 이후 고속열차까지 운행하는 새 선로이고, 오른쪽은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는 옛 만경강철교다. 허전하게 남아 있던 선로에도 열차는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여행객을 맞는 ‘비비정 예술열차’다. 4량의 객차를 연결해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노을이 아름답기로 알려져 해질 무렵 많이 찾는다. 야간에는 경관 조명이 켜져 밤 풍경 또한 낭만적이다.

비비정 위의 ‘비비낙안’ 카페. 바로 앞으로 만경강과 호남평야가 펼쳐져 전망이 시원하다.
비비정 위의 ‘비비낙안’ 카페. 바로 앞으로 만경강과 호남평야가 펼쳐져 전망이 시원하다.
비비정 위의 카페 ‘비비낙안’. 사방으로 툭 트여 전망이 시원하다.
비비정 위의 카페 ‘비비낙안’. 사방으로 툭 트여 전망이 시원하다.
비비낙안 카페 아래에 위치한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 현대식 건물에서 지역 노인들의 손맛으로 조리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비비낙안 카페 아래에 위치한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 현대식 건물에서 지역 노인들의 손맛으로 조리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비비정 뒤편 언덕 꼭대기의 카페 ‘비비낙안’ 역시 노을 전망대로 소문나 있다. 만경강 너머로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전망이 뛰어나다. 이런 곳은 대개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선점하기 마련인데, 이 카페는 주민들이 협동조합으로 운영하고 있어 더욱 반갑다. 카페 아래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과 삼례문화예술촌의 ‘새참수레’ 역시 지역에서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식당이다. 농가 레스토랑은 불고기주물럭, 버섯전골, 홍어탕이 주요 메뉴이고, 새참수레는 푸짐한 로컬푸드 뷔페 식당이다. 두 곳 모두 지역 노인들의 손맛이 밴 음식을 자랑한다.

완주=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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