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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팥과 생식샘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서로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기서 그 복잡한 발생과정을 살펴볼 생각은 없고, 서로 깊게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만 짚어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콩팥은 엉치뼈 부위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몸이 자라면서 점차 위로 올라가 최종적으로 첫 번째에서 세 번째 허리뼈 사이의 뒤배벽에 자리를 잡는다. 반면, 고환과 난소 즉 생식샘은 허리 부위의 뒤배벽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발생 과정 중 아래로 내려와 고환은 음낭 속에 난소는 골반 안 속에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콩팥과 생식샘으로 가는 혈관을 보면 참 재미있는 차이가 있다.

콩팥은 위치가 바뀌면 새로운 혈관과 이어지면서 동시에 이전에 있던 아래쪽 혈관은 퇴화시켜 없앤다. 콩팥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또 새로운 혈관과 이어지고 아래쪽 것은 또 없애고,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다 보니 가끔은 콩팥의 아래 끝으로 따로 들어가는 혈관이 덤으로 있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개의 혈관을 가지고 있는 변이도 흔하다.

필자는 혈관이 참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한다. 동맥은 지나가는 주변에 어떤 이유로 피가 아예 가지 않거나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작은 가지들을 내어 피를 공급하곤 한다. 예를 들면 새로 혈관이 많이 생기는 것이 암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것은 빠르게 자라는 암이 필요로 하는 피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새로 혈관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어느 부위로 가는 혈관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근처에 여러 개의 혈관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피를 공급받을 수 있다. 같은 부위도 여러 개의 혈관이 피를 공급하기도 하고, 또 이들 혈관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도 흔하다.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치면서 혈관을 공부할 때는 그 혈관을 잘 추적해서 어디까지 가는지를 확인하라고 주의를 준다.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사뭇 다른 위치나 경로로 다니는 혈관은 그 최종 목적지를 확인해야만 어떤 혈관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생식샘으로 가는 혈관은 참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생식샘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두 번째 허리뼈 높이에서 나온 혈관을 바꾸지 않고 사용한다. 이 혈관들은 생식샘이 아래로 내려갈 때 생식샘을 따라 내려가 성인이 되어서도 고환과 난소에 피를 공급한다. 생식샘의 위치가 바뀔 때 근처에 있는 혈관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나라가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국주의를 버리고 대통령 중심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였지만 구시대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했었다. 4ㆍ19의거, 5ㆍ16 군사정변,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촛불 혁명과 대통령 탄핵 등을 겪어오면서 우리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공고히 해왔고, 경제적으로도 경제개발5개년계획, IMF 사태 등을 지나오면서 경제강국으로 성장해 왔다. 심각한 위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 국민과 정부는 과거를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왔다. 마치 콩팥이 점차 위치를 바꾸면서 상황에 따라 새로운 선택을 했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 때마다 최선의 노력을 통하여 선택을 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히 청산하였다. 이러한 미래를 위한 선택과 과거의 청산은 과감한 결단과 선택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족보존이라는 엄청나게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생식샘이 원래의 혈관을 통해 피를 공급받는 것처럼 지켜야 할 것들도 있다. 우리가 흔히 뿌리라고 부르는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문화, 역사, 전통을 아울러 우리의 선조들이 가꾸고 지켜왔던 것들을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헌법을 만든 이는 헌법의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이라는 대목에 드러나 있다. ‘우리 대한국민’, 헌법을 만들고, 우리나라를 건국하였던 그 분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 역시 헌법 전문 마지막 부분의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라는 대목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이상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사회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부숴뜨리거나 새로운 것으로 바꿔서는 안되고, 꼭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로 밀접하게 얽혀 만들어지는 콩팥과 생식샘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을 만들면서 왜 한 가지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몸은 두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제는 필요없게 된, 어쩌면 불합리한 과거와는 단호히 단절하고 새롭고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지만, 지켜야 할 것은 명확히 가려 지키고 보존하여야 한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과거 청산이라는 명분하에 지켜야 할 것까지도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엄창섭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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