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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라피크 하리리 대학병원에서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 연합뉴스

영화 ‘가버나움’은 열두 살 소년 ‘자인’의 이야기를 통해 레바논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던 장소로 성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저주받은 마을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레바논 출신의 나딘 라바키 감독은 가버나움에 빗대어 자신이 경험한 레바논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최근 레바논 정국의 난맥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한때 ‘중동의 파리’였던 베이루트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위태로운 파산 위기에 놓인 레바논의 실상을 마주하면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

오늘날 레바논의 상황은 실로 점입가경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에 청년 실업률이 30%를 넘어섰고, 환경오염을 초래하는 만연한 쓰레기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기본적인 사회 인프라가 허술하여 전기와 수도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다. 인구 400만명에 불과한 레바논에 시리아 내전 발발로 인해 150만명의 시리아 난민이 새로 유입되며 사회 불안 요인은 더욱 심화되었다. 3월 7일 하산 디아브 총리는 레바논의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70%에 달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며 채무상환을 중지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급기야 4월 30일 레바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가 언급한 대로 레바논은 이미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황에 놓인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다.

레바논의 총체적 난관은 종파 간 대립으로 점철된 갈등의 역사가 빚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레바논은 기독교 마론파, 수니파 이슬람, 시아파 이슬람, 드루즈, 그리스 정교 등 무려 18개의 공식적인 종파가 공존하고 있는 모자이크 국가이다. 다양한 종파 간 혼재는 레바논 사회 내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어 왔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된 레바논 내전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 종파 갈등의 불씨 때문에 발발하였다. 내전 이후 레바논이 재건에 실패한 주요 이유도 종파 간 이해관계에 따른 부정부패가 국가발전을 가로막은 탓이 컸다.

이런 종파주의의 구도에 신물이 난 것일까? 작년 10월 종파를 불문하고 레바논 국민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나서 정부의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국기를 몸에 두르고 민생고 해결, 부패 청산, 정권 퇴진 등을 촉구했다. 레바논 남부에서 북부까지 국토 전역을 잇는 인간 띠가 형성되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레바논 정부가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인 ‘와츠앱(WhatsApp)’ 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자 격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레바논의 민심은 종파주의 정치 구조를 벗어나 정부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종파주의에 매몰된 정부 시스템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부패를 고착화하고 있다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사드 하리리 총리가 물러나고, 올해 2월 하산 디아브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최근까지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고 시위대가 은행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정국의 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레바논의 새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아야 하는 국가 역량의 또 다른 시험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여전히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공공의료기관인 라피크 하리리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코로나19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려 하나 의료장비 및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레바논 내 주요 도시는 물론 열악한 난민촌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하며 관계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파산 위기에 놓인 레바논의 암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희망찬 소식이 들려온다.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마음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바이트나 바이타크(Baytna Baytak)’ 운동이 있다. 바이트나 바이타크를 아랍어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의 집이 당신의 집입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코로나19와의 전선에서 싸우는 의료진들에게 무료로 머무를 거처를 마련해 주자는 취지의 깨어 있는 시민운동이다. 레바논에서는 의료 종사자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나서 돌아갈 숙소를 찾기가 마땅하지 않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감염 위험성 때문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

그렇다고 레바논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국가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자 일부 뜻있는 레바논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의료진들에게 무료로 빈집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제법 체계적인 시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지금은 도처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을 활용해 병원과 가까운 곳에 빈 호텔을 임대해 주는 등 의료진들의 숙박 문제 해결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다. 어쩌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레바논의 어두운 미래에 이렇게 깨어 있는 시민운동이 희망의 등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강석 단국대 GCC국가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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