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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일본 사회, ‘매뉴얼 왕국’의 명암 
조그마한 행동양식까지 꼼꼼하게 규정, 일본 특유의 장인문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매뉴얼주의’가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감염증 차단에서는 오히려 방역의 유연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 ‘매뉴얼주의’에 대한 한일 온도차

일본 사회는 ‘매뉴얼 왕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상황에서의 행동 지침이 촘촘하게 매뉴얼화 되어 있다. 정부나 대기업 등 상시적으로 돌아가는 큰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자그마한 구멍 가게나 일회성 행사에도 매뉴얼이 존재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진다.” 매뉴얼이 잘 지켜진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한국인이 많다. 요즘 말로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줄인 말로,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뜻의 은어)’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일본 문화의 ‘에프엠 (‘필드 매뉴얼’의 줄인 말로 ‘고리타분하다’는 뜻의 은어)’ 정신보다는 재빠른 상황 판단과 유연한 대처가 더 후한 평가를 받기 때문일 터이다.

거꾸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때때로 매뉴얼이 가볍게 무시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몇 년 동안 여의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직장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야근 후 자주 들르던 회사 앞 편의점에서 낯이 익은 한 직원이 어느 날 “왜 매일 밤 컵라면을 드세요?” 라고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잦은 야식으로 불어나는 체중에 가뜩이나 우울하던 그는 “그런 질문이 매뉴얼에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그러든 말든 “건강에 안 좋습니다~”라며 능청을 떨던 직원과 결국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에피소드이다.

이런 일이 일본의 편의점에서 일어날 확률은 ‘0’에 가깝다. 자주 보고 얼굴이 익어도 사적 대화를 건네는 것은 삼가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말이라고 해도, 손님과 직원 양쪽에 불필요한 심적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해프닝도 다행히 해피엔드로 끝났지만, 삐끗했다가는 ‘직원의 무례한 서비스’ 논란이나 ‘손님의 갑질’ 논란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이 에피소드를 전해 들은 것이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니,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매뉴얼주의가 강세를 보이는 만큼, 편의점 직원과 손님 사이에 돌발적으로 대화가 오가는 상황은 드물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한일간 매뉴얼을 보는 관점은 매우 다르다. “매뉴얼은 필요악” 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든 매뉴얼을 철저히 지켜야 된다는 일본인이 융통성 없는 고집쟁이로 느껴진다. 거꾸로 “매뉴얼은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에게는 상황에 따라 매뉴얼을 간단히 무시하는 한국인이 공사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는 허점투성이로 보이기 일쑤인 것이다.

◇‘모노즈쿠리’, 예측 가능한 재해 상황에서는 강점

일본 사회에서 매뉴얼이 이처럼 중요하게 된 배경에는, 거대한 정부 관료 조직이나 대기업에 필요한 조직 문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거대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예측 불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때문에 모두의 행동과 동선을 미리 약속하는 매뉴얼을 철두철미하게 갖추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삼가하는 문화적 성향도, 매뉴얼주의가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데에 일조했다.

매뉴얼주의는 일본 사회가 자랑하는 ‘모노즈쿠리 (ものづくり)’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강점이 된다. ‘모노즈쿠리’란 곧이곧대로 풀어 쓰면 ‘물건 만들기’ 라는 뜻인데, 일본말 소리를 그대로 살려서 일본의 전통 문화 속에서 잉태한 장인 정신을 칭송하는 말이다. 한 때 세계 시장에서 넘볼 수 없는 강자였던 일본 제조업의 비결이, 원칙을 중시하는 완고한 장인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의미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제조 공정에 대한 꼼꼼한 매뉴얼과 완고하게 이를 고수하는 태도는 물건의 완성도를 높이고 제품의 하자를 줄인다.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매뉴얼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장인처럼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매뉴얼주의가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지진이나 태풍 등의 재해 상황에서도 꼼꼼한 사전 준비와 매뉴얼이 큰 활약을 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적지 않은 지진 피해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일본 시민들이 지진에 특히 강한 마인드를 가졌다기 보다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행동 요령에 대한 매뉴얼을 철저하게 숙지해 두었기 때문에 비교적 차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필자도 대학 캠퍼스에서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소형 매뉴얼 북을 지갑 속에 항상 넣고 다녔었다. 근무하는 대학에서 배포한 매뉴얼인데, 강의 중에 지진이 오면 학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책임이 있는 입장에서 심적으로 위안이 된다. 다만 올해는 온라인 강의로 전면 대체된 만큼, 캠퍼스 지진 매뉴얼을 참조할 일은 없을 듯싶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매뉴얼주의

반면, 매뉴얼주의가 없느니만 못한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동일본 대지진 직후에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가 전형적이다. 다양한 종류의 원전 사고를 대비해 치밀한 행동 지침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대규모 지진 해일로 발전소의 주 전원과 비상 전원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파괴적 상황까지는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 행동 지침이 갑자기 사라지자, 일본 정부도, 전력 회사도, 전대미문의 사고를 처음 접한 시민들도 패닉에 빠졌다. 즉흥적으로 대응방법을 찾고 시행착오를 감수하며 실행하는 것은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일이기 때문이었다.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매뉴얼은 선지자의 풍부한 경험이 담긴 조언이겠지만, 누구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자칫 잘못하면 매뉴얼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이치에 맞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매뉴얼을 고수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매뉴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필요하게 허둥거리게 된다. 매뉴얼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 한계를 드러내는 매뉴얼주의

처음 경험하는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 일본 사회가 다시 한번 매뉴얼주의의 부작용에 몸살을 앓는 듯하다. 의료 기관에서 보건소로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이 팩스 송신으로 한정되는 바람에 감염자 집계에는 오류가 속출한다. 가계 보조를 위해 지급하는 특별 급부금은, 온라인으로 신청은 받지만 공무원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체크하다 보니 지급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코로나 사태로 생계를 위협받는 시민들에게는 일 분 일 초가 급한데, 두터운 업무 매뉴얼이 신속한 대응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한국 사회가 ‘코로나19’에 비교적 효과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매뉴얼에만 매달리지 않는 유연성도 큰 몫을 했다. 감염병 초기에 진단 키트에 대한 긴급 사용을 허가했다든가, ‘드라이브 스루’ 등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발빠르게 실천한 결과였다. 적어도 이번 사태는 경우에 따라서는 창의적인 임기응변이 매뉴얼주의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앞으로도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는 더 빨라질 터이고, ‘코로나19’ 사태처럼 과거에 경험한 적 없는 시련이 닥쳐올 가능성도 작지 않다. 시의적절하고 창의적인 임기응변이 앞으로 다가 올 사회에서는 핵심 전략이 될 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회는 매뉴얼주의의 부작용을 극복해야 한다는 중요한 숙제를 하나 받아 들었다.

그런데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임기응변은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일 뿐, 정공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이천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수십 명이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매뉴얼을 경시하는 풍조가 얼마나 위험한 지도 통감한다. 경험을 온전한 교훈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매뉴얼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매뉴얼주의에 빠져 유연성을 잃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원칙주의에서도 배울 점은 있는 것이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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