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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에 탑승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좌석 양쪽 끝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가족이 아프면 불안하고 심란하다. 특히 자식의 경우는 더 그렇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다. 아는 사람이 아프면 안쓰럽다.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보거나 그를 위해 기도해 준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아프다는 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에 측은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19는 타인의 건강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출퇴근길에서, 직장에서 많은 사람과 부대낀다. 식당에 가서도 홀 전체에 나 혼자만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늘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평생 만나는 사람들 수보다 우리가 하루에 만나는(물론 스쳐 지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그야말로 장삼이사(張三李四)요 필부필부(匹夫匹婦)다. 나와는 일말의 고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남자건 여자건, 돈이 많건 적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건 낮은 자리의 사람이건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당연히 내가 그들에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없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만 국한된 사회적 삶에만 관심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그들의 존재에 내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새삼 확인해줬다. 식당 옆 테이블에 앉았던 이가 확진자였다면, 그래서 그의 감염된 비말이 내게 옮겨졌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그를 전혀 모른다. 평소 같았다면 그가 말기 암환자라고 해도 나는 무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식당 옆자리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으며 마치 한식구라도 된 것처럼 그의 건강이 궁금했다. 그도 역시 나에 대해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 건강해야 할 의무를 공유한 셈이다. 그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확진자면 그는 감염자가 된다. 흔히 운명 공동체 운운하는 경우 많지만 전혀 모르는 그 사람과 내가 이토록 완전한 운명 공동체라니! 평생 살아오면서 그런 관계성을 느낀 타인은 없었다. 그러니 그가 건강하고 확진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리스먼이 말한 ‘군중 속의 고독’은 단순히 현대인들만의 숙명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나에게 영원한 타자이다. 내 가족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유대의 끈이 더 강하고 밀접할 뿐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된 코로나19는 그 치명적 위험과 간단한 접촉과 빠른 전파력으로 어쩔 수 없는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 고독은 완전한 고립이 아니라 누군가와 내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안녕이 바로 나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보다 더 실감나는 경우가 있을까?

만약 어제와 오늘 만난 이들이 300명이라고 치고 그들 가운에 단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들 모두 건강하고 전혀 감염되지 않은 덕분에 내가 무사하다면 그들이 내게 얼마나 고맙고 귀한 존재들인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뭇 사람이 내겐 모두 수호천사와 다름 아니다. 만약 내가 무증상 감염자여서 행여 그들에게 감염시켰다고 한다면 그 미안함과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렇게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지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러니 당신이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없었다면 단 한 번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얼핏 고립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일 수 있다. 고립이 아닌 고독의 회복이다. ‘자발적 고립’인 고독을 누려야 사유와 성찰이 가능하고 세상을 더 깊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 이 또한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누릴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지금까지의 무심에 대해 반성하고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해 살고 있음을 상기하게 되면 무례, 무심, 억압, 착취, 적개심 등의 못된 버릇을 조금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인격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당해봐야 소중한 것 알고 잃어봐야 귀한 것 안다. 그런 일 당하지 않고 건강 잃지 않으며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이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건강하기 때문에 얻은 선물이다. 건강한 당신이,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조심해준 당신이 있었기에 함께 누린 선물이다. 그러니 당신이 건강해서 고마울 수밖에 없다. 나도 당신에게 건강해야 할,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소중한 당신’이다. 당신이 건강해서 정말 고맙습니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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