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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은 결코 유치하지 않습니다. ‘꿈꿔본다, 어린이’는 아이만큼이나 어른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어린이 책을 소개합니다. 미디어리터러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4>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삽화. 비룡소 제공

5월은 아마도 어린이들이 일년 중 가장 편지를 많이 쓰는 달일 것이다. 5월 5일 어린이 세상은 잠깐일 뿐, 어린이들은 바로 ‘은혜’에 대한 감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바쁘다. 종이로 카네이션 만들기와 감사 편지 쓰기, 카드 만들기, 효도 쿠폰 만들기, 부모님과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 부르기 등등의 활동이 5월 15일까지 이어진다.

누가 이렇게 날짜를 정했는지 모르지만 약간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꾹꾹 종이에 눌러쓴 어린 제자들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보고싶어요’가 가득 담긴 편지를 받으면 사랑스럽고 예쁘면서도 미안하기까지 하다. 한 면을 다 채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론 편지도 좋지만 가정의 달을 보내며, 어린이들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이들에게 조금 더 형식을 넘어서,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은 없을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아름다운 그림책,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아름다운 책은 꼭 아이들과 함께 5월에 읽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할머니를 추억하면서 만든 책이다. 작가는 할머니의 유품을 통해 그녀의 삶을 추억하고 기념하며, 앞으로 길고 긴 일생을 살아가게 될 아직 아기였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자장가를 부른다.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삽화. 비룡소 제공

“잘 자라, 작은 방직공아, / 너는 앞으로 할 일이 참 많단다.”

할머니 훌다의 일생은 작가인 손녀딸에 의해 레이스와 자수가 있는 손수건과 다양한 직물공예, 아플리케, 레이스, 그리고 크레톤과 플란넬, 밸벳과 새틴과 같은 방적공장의 아름다운 옷감들의 이미지로 재구성되었다. 할머니 훌다 마리아 예게르 부트나렉(1911~1987)이 평생을 보낸 곳은 직물산업이 발달한 폴란드의 도시 ‘우츠’ 였기 때문이다.

그곳은 깊은 밤에도 잠들지 않으며 방적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한, 여름이나 겨울이나 하얀 솜이 거리에 흩날리는 도시였다. 할머니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다른 우츠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천을 짜는 어른들과 함께 일했다.

어릴 적에는 언니들에게 자수와 코바늘 뜨기와 뜨개질을 배우고, 조금 더 자라서는 인형옷을 배우고 더 자라서는 새틴 이불보와 줄무늬 플란넬도 만들게 될 것이다. 할머니의 일생은 테이프, 레이스, 수틀과 뜨개실로 가득했다. 책 전체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직물들은 할머니의 일생을 상징하는 사물들이다.

작가는 할머니 훌다의 일생을 작가와의 개인적 관계, 혈육 혹은 양육자로서 추억하는 것을 넘어, 한 시대를 살다 간 존엄한 인간으로서 그 일생을 조망하고 기념한다. 할머니는 밤낮으로 기계 앞에서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한 도시의 산업의 중심에 있었던 강인한 여성노동자의 일원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것은 가정을 꾸미는 레이스나 손수건 같은 작은 수공예품뿐 아니라 당대 여성과 남성들의 패션을 만드는 아름다운 옷감이었고 전시에는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와 상복을 만드는 직물이었다.

페이지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직물의 이미지로 재구성된 할머니 훌다의 일생 앞에서 독자는 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위해 자신과 친구들이 수집한 직물들, 그리고 친구들의 할머니의 유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은 작가의 할머니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다간 수많은 할머니들의 인생에 대한 기념이 될 것이다.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지음ㆍ이지원 옮김
비룡소 발행ㆍ72쪽ㆍ2만5,000원

우리의 할머니들은 역사책에 실려있지는 않지만 예술가가 된 딸과 손녀딸들은 작품을 통해 그들 역시 역사적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시민이었음을 기념한다. 토릴 코브(Torill Kove)의 단편 애니메이션, ‘할머니는 왕의 셔츠를 다림질했다’(My Grandmother Ironed the King's Shirts, 1999)는 노르웨이의 왕실 세탁부였던 할머니가 겪은 노르웨이의 근대사, 그리고 세탁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독일 점령군을 괴롭혔는지에 대한 일화가 코믹하게 담겨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 미술가인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는 남부 농장에서 퀼트를 만들던 노예였던 4대조 할머니를 기념하는 퀼트와 바느질 기법을 회화에 적용하여 개인과 가족의 역사를 기록한다. 일본의 여성 아오다 케이코는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후쿠시마를 동일본대지진으로 떠나게 된 후,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 의상과 직물을 오려 후쿠시마에서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편지를 쓰고 종이꽃을 달아주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요즈음, 할머니의 물건들에 담긴 추억과 이야기를 어린이와 함께 나누면서 할머니 역시 밥을 해주고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엄마의 엄마일 뿐 아니라 한때는 어린이였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생활인이었으며 우리 사회를 함께 만들어 온 시민임을 어린이와 함께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

* 토릴 코브(Torill Kove)의 단편 애니메이션, <할머니는 왕의 셔츠를 다림질했다>는 캐나다 NFBC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fJrv1_s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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