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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갑질의 민족인가
경비원에 폭언… 교수들 악행ㆍ식당손님까지
남과 나를 구분하려는 집요함에 근절 어려워
하도급되고 눈에 보이지 않게… 갑질도 진화
“해법은 마음가짐이라는데 너무 순진할 걸까”
지난 14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모여서 경비원 최모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씨는 입주민의 갑질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김영훈 기자

서울 강북구의 아파트 경비원이 최근 입주민의 폭행과 폭언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경비원이 남긴 유서를 보면 그가 겪은 끔찍한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서글픈 현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가해자가 구속돼 법적 심판은 받겠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6년 전에도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서 입주민의 ‘갑질’에 시달리던 경비원이 분신한 사건이 있었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된 겁니다.

‘갑질’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고질병일까요. 비단 입주민과 경비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란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기업 오너나 임원들의 갑질, 대학원생을 상대로 한 교수들의 갑질 등 지위를 이용한 악행들이 판을 칩니다. 종업원을 향한 손님들의 갑질과 택배기사를 겨냥한 고객들의 갑질 등 일상에서도 갑질은 쉽게 목격되죠.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 지 오래됐지만, ‘갑’들의 의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 같습니다.

갑질은 도대체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는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요. 갑질에 특히 민감한 밀레니얼 세대가 갑질의 이면을 언박싱 해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숭례문 너굴맨(너굴)=서울 강북구 아파트의 ‘갑질’ 가해자가 경비원을 폭행하기도 했다잖아. 유서엔 ‘자기처럼 억울한 일 당해서 맞아 죽는 사람이 없게 꼭 밝혀달라, 강하게 처벌해 달라’고 호소했어. 정말 안타깝고 충격적이었어.

기타치는 프레디머큐리(기프)=사건 본질이 결국 ‘갑질’이잖아. 특히 경비원에 대한 갑질은 여전한 것 같아. 우리 집에선 설 선물 들어오면 경비원께 드리는데 별로 좋은 내색을 보이지 않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명절 선물을 갖다 주는 입주민들이 있어서 그렇대.

부어먹는 깡소주(부어깡)=주택관리공단이 작년 9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6월까지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폭언ㆍ폭행 건수는 2,923건에 달했대. 이 중에서 주취 폭언ㆍ폭행이 1,382건으로 절반 가량을 차지했고, 흉기 협박도 24건이나 발생했어. 경비원에 대한 폭언ㆍ폭행은 최근 5년간 15배나 증가했고.

분노 조절 잘해(분조잘)=정말 심각해. 그런데 갑질이 여러 번 사회적 논란이 됐는데도 비슷한 일들은 끊이질 않는 것 같아.

기프=우리처럼 사회 초년생에게도 갑질은 익숙한 일이잖아.

연어는 차갑게(연어)=조개구이 무한리필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손님들에게 갑질을 당한 기억이 많아.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바닥에 일부러 던지고 ‘이거 치워라’라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어. ‘술 가져와’라고 반말하는 건 예사고. 정말 힘들었어.

너굴=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형마트 장난감 판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너무 오래 시연을 하는 거야. 주의를 줬더니 부모들이 ‘사면 되지 않느냐’라며 도리어 화를 내더라고.

분조잘=학원 강사를 한 적이 있어. 내가 가장 어리기도 하고 경력도 없다 보니까 원장님이 너무 사소한 허드렛일까지 시키더라고. 복사는 기본이고 수업 중인데 상담 온 학부모한테 커피를 타 드리기도 했어. 그건 명백히 강사 업무가 아닌데도 말이야.

연어=의류회사 총무팀에서 일한 적이 있어. 내가 막내라는 이유로 관련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까지 떠맡았어. 회사 전체에 전화를 돌리거나 건물 도면 프로그램까지 만들라고 시킨 적도 있어. 커피 타는 건 기본이고.

매마=내가 다니던 회사의 상사는 ‘잘리고 싶냐’는 말을 자주 했어. 인턴들에게도 말이야. 누군가 본인 심기를 불편하게 행동하면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더라고. 인턴들은 졸업 요건을 충족해야 하니 끝까지 버텼지만, 화장실에서 우는 모습을 적잖게 볼 수 있었어.

분조잘=나도 회사 다니면서 아무렇지 않게 외모 지적을 많이 당했어. 너는 살을 좀 빼야겠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부어깡=맞아. 그런데 불쾌한 말을 들어도 기분 나쁘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아. 아무리 상사가 그런 말을 했어도 토를 달거나 거부의사를 밝힐 수가 없어. 내 밥줄을 잡고 있는 사람이잖아.

기프=학교도 마찬가지야. 특히 교수가 조교에게 하는 갑질은 너무 흔해. 친구가 연구실 조교였는데, 교수가 수업할 파워포인트 자료를 일정 분량으로 만들어 오라고 시켰어. 보조 수준을 넘어선 거지.

연어=뉴스에도 많이 뜨잖아. 논문도 대필해 준다고. 오죽했으면 대학원생이 교수 갑질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폭파 사건을 일으켰겠어.

너굴=교수는 ‘슈퍼갑’인 것 같아.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시험감독이든 채점이든 교수가 아니라 조교가 하고, 강의 관련 문의도 다 조교가 받잖아.

부어깡=교수에게 모든 권한이 지나치게 쏠린 게 문제야. 대학원 논문심사를 지도교수에게 받고, 교수가 통과 안 시켜주면 졸업 못 하잖아. 이렇게 되면 갑질 당해도 반항할 수가 없어.

기프=이건 구조적 갑질이야. 모든 교수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갑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러다 보니 조교들도 까칠해지고, 조교를 대하는 학부생들은 주눅 들고.

연어=정말 심각한 게, 조교를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모자라서 성희롱이나 성폭력까지 일삼았던 사건도 있잖아.

기프=우리 학교에선 이런 사건도 있었어. 어떤 교수가 학부생 중 예쁜 학생만 골라서 개인면담을 하자고 한 거야. 그러면서 사적으로 밥 사주는데 학생들은 불이익 받을까 봐 말도 못 꺼냈대.

대한항공 직원들이 2018년 5월 18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을 규탄하는 촛불집회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하도급되는 갑질

기프=군대에도 갑질이 있지만 전시 상황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룰이잖아. 그런데 왜 군대에서 적용돼야 할 것들이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한 걸까.

연어=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국회나 정부기관도 그렇고, 회사 임원들도 대부분 남성이잖아.

분조잘=군대식 상명하복 문화가 사회 곳곳에 이식됐다는 주장도 있어. 빠른 발전을 위해선 상명하복 구조가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부어깡=우리나라는 특히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됐잖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경제 성장률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과정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위에서 시키면 그대로 하는 구조가 당연시되고, 그게 갑질을 내재화시킨 주범이 된 것 같아.

기프=경제적 격차로 생기는 신분제도 원인인 것 같아. ‘21세기 골품제’라고 할까. 더구나 새로운 신분제는 세습되잖아.

너굴=요즘 초등학생들이 ‘엘사(LH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와 ‘휴거(휴먼시아와 거지를 합친 말)’라는 말을 쓴다고 해. 공공주택에 사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야. 돈이 계급을 가르는 수단이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체득하는 거지.

기프=자본이 학력을 결정하고, 학력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잖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잖아.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갑질을 하고.

매마=직업의 귀천의식이 너무 강하게 뿌리 박혀 있어. 경비원이나 청소노동자 같은 블루칼라 노동자에 대해서 특히 그런 것 같아. ‘5등급 받으면 용접공 된다’고 말한 학원강사가 논란이 되기도 했잖아.

연어=전문직이나 부잣집 자녀들이 가사도우미나 운전기사에게 하는 갑질도 많잖아. 돈이나 경제력이 자기 것이 아니고 부모 것인데도 말이야.

분조잘=천민 자본주의라는 말도 있어. 돈과 경제력을 너무나 중시하는 사회가 돼 버려서 기본적인 인간존엄조차 지켜지지 않게 된 것 같아.

기프=경제력과 성별, 사회적 지위 등 끊임없이 상대와 나를 구분 짓고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데서 갑질이 생겨나는 것 같아. 이 집단에선 갑이 아니어도 저 집단에선 갑이 될 수 있는 거지.

연어=무한경쟁 사회에선 누군가를 깔고 앉아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나 봐. 거기서 만족감을 찾고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갑질이 나타나는 거 아닐까. 나보다 아래 있는 사람을 계속 찾다 보니 갑질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게 아닌가 싶어.

분조잘=그런데 경비원이나 감정노동자에게 특히 갑질을 하는 이유가 뭘까.

연어=다수와 소수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아. 상대적으로 소수집단이다 보니.

매마= 맞아. 일반 직장인들은 조직 내에서 아무리 지위가 낮아도 다수잖아. 그러다 보니 담론이 형성될 만한 공간이 형성돼 방어할 수단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런데 경비원 같은 약자는 다수도 아니고 여론을 형성할 힘도 없거든.

지난 11일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실 앞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주민들이 경비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손님은 반드시 왕일까

매마=올해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갑질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86%가량이 갑질이 심각하다고 대답했어.

연어=갑질에 대한 인식변화도 확인할 수 있어. 가령 ‘커피 타 와’ 같은 말을 예전엔 상사 지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함을 느끼게 됐다는 거지. 요즘엔 직접적으로 폭언을 쏟는 대신 은근히 갑질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잖아.

기프=나는 일용직 노동자나 서비스직을 향한 갑질이 심각하다고 느껴. 어느 생활용품 매장에 가면 ‘당신 앞에 있는 직원은 누군가의 동생, 친구, 딸일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구까지 나올 정도잖아.

부어깡=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거든. 스터디카페 카운터 업무였어. 그런데 커피 달라거나 택시 불러 달라고 부탁하는 손님들이 꽤 많았어. 내가 맡은 일이 아닌데, 당연히 서비스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

분조잘=그래도 과거엔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이 시장을 지배했다면, 이제는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 손님뿐만 아니라 노동자까지 배려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거지.

기프=동감해. 이런 논의가 계속되다 보니 ‘을’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도 늘어나고 있어. 직원(Worker)과 손님(Consumer)의 균형을 의미하는 신조어인 ‘워커밸’이 등장했다는 것도 그런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고 봐.

연어=작년 7월부터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되고 있잖아.

분조잘=취지는 좋지만 한편으론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야. 직장이라는 범위를 정해 버리니까 사각지대가 생기잖아. 경비원과 입주민의 관계처럼 직장 이외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갑질을 방지하긴 어려울 것 같아.

연어=일반 회사도 마찬가지야. 시행 100일 뒤 설문조사를 했는데 68%의 응답자가 직장 내 괴롭힘이 그대로라고 답했어. 갑질에 관한 사례만 수집할 뿐, 제대로 된 처벌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야.

너굴=갑질 자체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해. 법이 시행됐지만 가해자는 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내부고발자는 이직이나 퇴사를 택할 수밖에 없거든. 갑질 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 문제제기 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부어깡=그래도 법이 만들어져서 예방효과는 있는 것 같아. 정말 처벌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이것도 갑질이니까 하지 마세요’라는 경고인 셈이지. 법을 제정한 의미도 거기에 있다고 봐.

지난해 7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시민단체 인사들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홍보하는 모습. 연합뉴스

◇우리는 갑질의 민족인가

분조잘=상사가 부하에게, 교수가 제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못된 짓 만 갑질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매마=인터넷에서도 갑질이 만연해. 유명 블로거나 인플루언서가 자신의 유명세를 가지고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례가 있잖아. 내 영향력과 파급력으로 누군가에게 흠집을 낼 수 있다고 믿고 갑으로 올라서려고 하는 거야.

기프=참, 이런 게 인간의 본성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의 특성인가. 우리는 갑질의 민족인가 봐.

연어=갑질은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상대방을 가스라이팅(상황조작을 통해 타인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하는 것도 결국 위계를 설정해 놓고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막 다루는 거잖아.

분조잘=연인 사이에서 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할까.

매마=다른 인간관계에서 열등감을 느끼다 보니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우월감을 채우려는 거지.

너굴=연예인에게 악성 댓글을 다는 악플러도 비슷한 심리 같아. 악플러 잡고 보면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잖아. 명문대생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열등감은 상대적인 거라고 봐.

매마=열등감도 경쟁사회의 산물 같아.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면이 크게 작용해서 개선하기 힘들잖아.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더 높은 대상을 의식하면 열등감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니까.

기프=경쟁사회의 구조 자체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열등감을 심어주는 것 같아. 열등감은 경쟁을 더욱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그렇게 우리 마음은 점점 병드는 거지.

분조잘=일부 기업에선 갑질 문화 개선을 위해 직급 대신 영어이름으로 부르거나 호칭을 통일시키고 있대.

매마=그런데 영어이름을 쓰면서 뒤에는 직급을 그대로 부르는 곳도 있대. 이런 걸 보면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정말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의심돼.

기프=과도기의 혼란스러운 모습 같지만 이런 시도 자체가 유의미하다고 봐. 가장 중요한 건 갑질에 불편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해소하려는 태도니까. 직업의 귀천을 사람의 귀천으로 인식하면 안 되잖아.

부어깡=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노력도 중요해. 갑질 문화가 공론화되는 계기는 항상 ‘을’이 폭로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거잖아. 이제는 위에서 극복하려는 시늉이라도 보여주면 좋겠어. 그래야 사회 전체가 갑질 없는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가. ㅎㅎ

정리=김예슬 인턴기자

참여=강보인, 이주현, 이태웅, 이혜인, 임수빈 인턴기자

※ 이슈와 화젯거리를 이야기할 때 기성세대는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밀레니얼 세대는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견 표출의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의 시각을 담아 한국 사회를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밀레니얼의 솔직한 체감지수를 느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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