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한반도형 CTR을 모색하자

입력
2020.06.02 04:3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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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CTR)을 들여다보면 과연 북한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미국 CTR의 시작은 이렇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엄청난 수량의 핵무기가 몇몇 국가들에 남겨졌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그 국가들이었다. 혼란을 틈타 핵무기가 테러리스트나 다른 국가에 퍼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핵 폐기에 돈을 댄다. 지난 28년 동안 이 프로그램은 성공을 거뒀다. 핵탄두 7,600여 기가 해체 또는 비활성화 됐다.

그런데 오해가 좀 있다. 많은 이들은 미국이 구소련 3국에 핵 폐기의 대가로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을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핵 폐기의 실비를 제공했을 뿐이다. 핵시설을 민수용으로 전환하거나 핵 관련 인력의 취업지원도 했지만 그것은 핵 폐기의 일환이었다.

다른 오해는 미국이 이 프로그램에 ‘엄청난’ 자금을 퍼부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확보한 통계는 1992년부터 2016년까지 25년 동안의 수치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우리 돈으로 약 17조 원 정도를 썼다. 냉전 종식 이후 로마제국에 비견되던 미국의 위상을 고려하면 푼돈에 가까운 규모다.

이 자금이 구소련 3국에만 쓰인 것도 아니다. 주적이었던 러시아에도 돈을 댔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리비아와 이라크의 핵 프로그램 폐기에도 당연히 이 자금이 들어갔다.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해체에도 쓰였다. 이들 국가 외에도 많은 국가에 자금이 투입됐다.

자, 이제 한반도로 돌아와 보자. 미국이 했던 CTR 프로그램을 한반도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다. 구소련 3국은 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포기도 쉬웠다. 핵 포기 결정이 이뤄지고 난 후에 CTR 자금이 들어 온 격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 수십 만 명의 희생과 경제제재를 견디며 핵을 개발 했다. 순순히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리비아와 이라크는 핵을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북한과 비교할 수 없다.

핵을 포기하면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믿은 우크라이나는 비핵화 이후 십 수 년 만에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뺏겼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길거리에서, 그리고 이라크의 후세인은 잡혀 죽었다. 경제는 어떤가. 서구 경제권에 편입되면 볕 들 날이 올 줄 알았지만 구소련 3국의 경제는 카자흐스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시원찮다.

이 모든 정황을 보고도 북한에게 핵 폐기 비용은 국제사회가 댈 수 있으니 비핵화하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씨도 먹히지 않을 요구를 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정상적으로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2015년 11월 15일, G20 정상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과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국제사회와 힘을 모아 매년 630억달러의 수요가 예상되는 동북아 지역의 인프라 투자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언론은 이를 ‘박 대통령, 북한 핵 포기 시 매년 70조 원 지원 약속'으로 보도했다.

허나 많은 돈을 준다고 북한이 단박에 비핵화할까. 안보와 경제를 바꾸는 바보는 없다. 70조 원은 북한 GDP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이 투입되면 북한체제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단박에 비핵화 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영문 모를 분노에 차 있는 북한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할 거다.

한동안은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길고 험난한 세월이 우리 앞에 있다. 어쩌면 미국이 러시아에 자금 지원을 했던 것처럼 국내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결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타협을 위해선 다소 무리도 해야 한다.

‘공존’의 방법을 고민하며 아무도 안 가본 새 길을 가야 한다. 그게 한반도형 CTR이 될 거다.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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