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겨두고 싶은 즐거움

입력
2020.06.03 23:19

지금의 생각이 지금의 나다. ‘어떻게 하면 잘 늙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걸 보니, 나는 늙은 게다. “You know you’re getting old when comfort comes first before style.” 스타일보다 편한 것이 먼저가 되면 나이 드는 거란다. 헐렁하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납작하고 푹신푹신한 운동화를 신고, 고급 가죽 백이 있는데도 싸고 가벼운 헝겊가방을 들고 나가는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휴대전화가 친절하기도 하다. ‘과거의 오늘 있었던 추억’이라며 그때 찍은 사진을 통보해준다. 덕분에 지나간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새삼 놀란다. “아, 그때 그랬었지!” 하는데, 그 시간이 어느새 아득하고 아련해져 또 놀란다. 고작 일 년 전인데도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때는 엄청 젊었고 지금은 엄청 늙었다. 나이가 들수록 늙는데 가속이 붙나 보다.

내 아이들을 제외하면 내 주변에는 온통 나만큼 나이든 사람뿐이다. 시어머니와 친구의 부모님을 포함하면 주변 사람의 평균 나이는 더 많아진다. 뽀얀 피부 덕분인지 돌아가신 엄마는 요양병원에 누워있을 때도 고왔다. 예뻤고 또 예쁘게 입고 다녔던 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못 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지는 못해선지 멋지지는 않았다. 노인이 되더니 엄마는 엄마 옷이 아니라 노인 옷을 입고 있었다.

50년을 약사로 일했던 시어머니는 매우 활동적이고 씩씩했다. 늘 에너지가 넘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매일매일 옷을 차려입었다. 그런 어른도 일을 그만둔 후에는 노인 옷을 입는다. 체력이 약해지고 만나는 사람도 줄어들어 굳이 옷을 살 필요가 없어졌는지 가진 옷을 그대로 입는다. 입던 옷을 그냥 입는 게 노화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두 어른에게서 본받을 점도 많지만, 나는 이왕이면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인까지는 어렵더라도 멋진 노인은 되고 싶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막연했던 바람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가만히 있어도 늙는 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늙지는 않으련다. 이제 옷 정도는 내 몸에 맞춰도 되고, 옷 정도는 내 마음대로 입어도 되지 않을까? 흰머리와 주름이 젊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나는 여전히 올라가고 싶은 나무를 꿈꾸고,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한다.

옷이 사람을 설명하기도 한다. 내 옷장에는 ‘나 세련됐지요?’ 하고 드러내지 않는 옷, 브랜드나 디자이너를 말하는 게 아닌 나를 말하는 옷,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내가 선호하는 옷을 걸 거다. 디자인이 단순하고 수수해서 다른 옷과 맞춰 입기 쉬운 옷과 또 입어도 싫증나지 않는 옷을 입을 거다. 유행을 타지 않는 질 좋은 옷을 손질해가며 오래오래 입고,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을 아끼지 않고 즐겨 입을 거다.

“나이든 여자에게 외모는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늙은 얼굴에 코가 빨갛건 번들거리건 두 뺨의 실핏줄이 터졌건 말건 아무도 못 알아챌 테지만, 자기 눈에 그런 것들은 훤히 보이고, 그런 울적한 모습을 좀 매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의 외모가 곧 그 사람의 됨됨이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니까.” -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멋진 노인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련다. 늙어서 입을 옷을 일부러 사는 건 아니지만, 나이 들어서 더 어울릴 것 같은 옷은 남겨두고 싶다. 주름진 얼굴에 나만의 개성을 더해줄 돋보기 안경테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묶은 후 살포시 어깨에 두를 연한 라일락꽃 색깔의 숄도 있을 거다. 기억 속에 보관해두었던 지난날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새빨간 토트백도 분명 있고말고. 나이가 들어서도 좋아하는 것에 들뜨고 싶고, 그런 즐거움은 남겨두고 싶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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