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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13> ‘아날로그 원어민’이 주도하는 일본 사회
사회 전반의 '디지털 기술' 수용도에서 일본은 한국에 비해 아날로그 성향이 훨씬 강하다. 4차산업혁명에서 한국이 그만큼 앞서갈 수 있다는 얘기지만, 일본만큼은 아니어도 한국 사회도 디지털 약자에 대해 더 많은 배려를 할 필요가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본에서는 아직 많은 것이 아날로그이다.

일본에서는 아직 많은 것이 아날로그이다. 필자가 사는 도쿄의 맨션(일본에서는 한국의 ‘아파트’를 맨션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아파트’라고 하면 목조로 된 저층 공동주택을 뜻한다)의 현관문은 열쇠로만 딸 수 있다. 최신식 맨션은 아니지만, 시설이 낡은 단지도 아니다. 일본에서는 도어락이나 카드키 등 디지털 잠금 장치보다 열쇠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있다. 열쇠를 몸에 지니는 불편이나 분실로 인한 위험성보다, 비밀번호가 유출되거나 카드키의 디지털 정보가 악용될 리스크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주민들이 함께 쓰는 공동 현관에는 디지털 잠금 장치를 도입해도 집의 현관문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다.한국에서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앞선다는 의식이 일반적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디지털이 더 최근에 등장했다는 것은 팩트이지만,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나날이 증가하는 디지털 범죄의 위험을 피한다는 점에서도, 아날로그를 단순하게 과거의 ‘적폐’ 취급할 일은 아니다.

◇왜 일본에서는 전자화폐가 정착되지 않을까.

외국인들은 일본에서 신용카드 사용이 불가능한 가게가 많다는 점에 깜짝 놀란다. 인공지능 로봇이 휴대폰을 팔고, 가상현실 게임기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상용화되는 나라이지만, 정작 신용카드나 모바일 지불 등 전자화폐는 정착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에 지폐나 동전으로 직접 지불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201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전자화폐 거래 비율은 20%도 안 된다. 신용카드 발급 심사 기준이나 세금 투명성 등 금융 정책과도 관련이 있는 만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 비율이 90%에 육박하는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일본에서 전자화폐가 정착되지 않는 이유를 둘러싸고 의견은 분분하다. 세뱃돈이나 축의금 등 친한 사람들끼리 현금을 주고받는 전통 때문에, 혹은 거스름돈을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가게 점원들의 능력 덕분에 현금 선호가 일종의 ‘문화’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자화폐 보급률이 높은 한국과 중국에도 세뱃돈이나 축의금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 또, 거스름돈 계산 능력이라면 스피드가 생명인 마트나 시장에서 단련된 한국의 자영업자들이 뒤처질 리가 없다. 어설픈 문화론보다는, 지갑에 현금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근거 없는 ‘심리학’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분명한 것은, ‘하이테크 사회’를 자부하는 일본이지만,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점이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령화 사회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행정이나 금융 등 공공 부문을 포함해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의 수혜자는, 주머니는 넉넉하고 아날로그가 훨씬 편한 노년층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보다는 노년층이 살기 좋은 생활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디지털화를 서둘러 이들에게 불편한 세상을 부채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어느 쪽이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가.

2000년대 초반에 ‘디지털 원어민’(‘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한다)이라는 개념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가 세상에 존재했고, 때문에 아날로그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나온 것이 벌써 20여년 전이니 디지털 원어민이라고 불리던 젊은이들도 지금은 불혹을 앞두었다.

당시에 디지털 원어민과 ‘디지털 이민자’의 차이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이메일을 보내고 ‘이메일을 보냈으니 체크하라’고 전화로 확인해야 안심이 되면 디지털 이민자, 반대로 전화 통화보다 이메일이 더 안심이 되면 디지털 원어민이라는 것이다. 더 오래 전에는, 전자계산기의 결과를 손으로 풀어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면 나이든 세대, 손으로 계산한 결과를 전자계산기로 검산해야 마음이 놓이면 젊은 세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실제로 간단한 계산이라면 전자계산기보다 직접 공책에 써서 푼 결과가 더 마음이 놓인다는 사람이 많던 시대가 있었다.

디지털 덕분에 많은 일이 편하고 빨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편리함과 스피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익숙해지기만 하면, 외출할 때 현관 열쇠를 챙기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지갑 속에 두툼하게 지폐를 넣어 놓거나 동전을 세는 것도 의외로 기분 좋은 취미인 것이다.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라는 선택에는 기능성이나 편리함뿐 아니라, 이유 없는 안도감, 습관이 주는 편안함 등 정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디지털 원어민과 디지털 이민자를 구분하는 경계선도 결국 디지털과 아날로그, 어느 쪽에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느냐는 지점이다.

◇‘디지털 원어민’보다 ‘아날로그 원어민’을 우선시해 온 일본 사회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공식적인 업무 상대에게는 “몇 시쯤에 전화를 드려도 좋겠느냐”는 이메일을 보낸 뒤에 전화를 하는 것이 관행이다. 불쑥 디지털을 들이대기 전에 아날로그로 양해를 구하라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일본에서는 예의바름의 기준이 나이 든 세대의 정서적 안정감을 조준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사회를 주도하는 이 계층은, 어떻게 보면 아날로그 세계에서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디지털 이민자보다도 ‘아날로그 원어민’ 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공직자를 뽑는 선거는 일본 사회가 아날로그 원어민의 감성에 얼마나 충실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투표 용지에 후보의 이름을 자필로 쓰는, 반 세기 전 방식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때문에 후보자 이름의 한자를 잘못 쓴 무효표가 적지 않게 나온다. 디지털 미디어의 자동 변환 기능을 활용한 글쓰기에 익숙한 젊은이에게는 투표 용지에 한자로 이름을 쓰는 방식이 어렵고 어색하다. 디지털 원어민에게 더없이 불편한 선거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으니, 젊은 층의 투표율이 낮다고 탓할 것만은 아니다.

그러던 일본 사회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로소 디지털 원어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감염병 사태에 대응하는 행정 서비스의 느리고 복잡한 절차가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장점인 스피드와 편리함, 절차의 간소화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가 앞장서서 공문서의 전자화, 온라인 행정 처리의 강화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은 좋은데, 도장을 대신할 ‘전자 인감’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등 답답한 구체안을 보면 아날로그 원어민의 발상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겠다 싶다.

◇한국에서는 ‘디지털 난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에 비해 한국은 디지털 원어민을 위한 사회로 비교적 연착륙한 듯이 보인다. 나이든 세대도 문제없이 채팅 앱으로 동영상을 주고받고 인터넷 검색도 뚝딱 해낸다. 많은 아날로그 원어민이 디지털 이민자로 무사히 정착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디지털이라면 무조건 바람직한 일인 양 진행하고 보는 성급함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 심지어는 공공기관의 웹 사이트조차 – 일부 컴퓨터 운영 시스템만 지원하는 ‘액티브 엑스’ 모듈 실행을 필수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모듈이 동작하지 않는 시스템에서는 인터넷이 무용지물이니, 네트워크에 접속해도 편리함을 누릴 길이 없는 ‘디지털 난민’이 양산된다. 일본처럼 디지털 이민자에 대한 배려가 도를 넘는 것도 어리석지만, 한국처럼 다양한 디지털 주민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도 문제를 만든다.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에서 공인인증서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소식은 더없이 반갑다. 그 얄미운 제도 때문에 필자도 십 수년 동안 디지털 난민으로 떠돌았다. 다양한 디지털 주민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좋은 세상의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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