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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4주마다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29>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한 장면. 지독한 반대를 겪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전이다.

‘달콤한 말’은 사랑을 사랑으로 자라게 하는 효모다. 달콤한 말은 사랑을 발효시키고 부풀리며 맛있게 한다. 사랑에 빠진 자는 종종 멀쩡한 사람이 듣기엔 허황되어 보이는 말, 못 견디게 간지러운 말들을 지껄인다. 내가 방금 ‘멀쩡한 사람’이란 말을 썼는데, 잘못 쓴 말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종종 멀쩡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이 땅에서 떠있는 듯 불안정해 보이고, 이따금 넋 나간 듯 먼 곳을 본다. 여기 있지만 여기 없는 듯 굴고, 이유 없이 웃거나 운다. 비약과 상상으로 이성을 도피시키고, 감정의 극지에만 골라 서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가 보기엔 혀를 찰만한 모습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급성으로 위독한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 유명한 창문 세레나데 장면을 보자. 달빛이 비추는 창 아래 한 남자가 서있다. 사랑에 빠진 로미오다. 이제 막 창문으로 등장하는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다. 곧 세레나데를 시작하겠지만, 그 전에 로미오는 첫 대사를 던진다. “다쳐 본 적 없는 자가 흉터를 비웃는 법.”(51쪽) 이 의미심장한 독백 이후 로미오는 줄리엣을 향한 ‘찬시’를 읊조린다. 사랑이란 수렁에 빠진 자의 독백!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한 장면. 지독한 반대를 겪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전이다.

“그녀 눈과 별들의 자리가 바뀌면 어찌 될까? 그녀 뺨은 너무 밝아 햇빛 아래 등불처럼 별들은 창피해하리라. 하늘로 간 그녀 눈은 창공을 가로질러 너무 밝게 빛나므로 새들은 노래하며 대낮이라 여길 거야. 저것 봐, 손으로 자기 뺨을 받쳤어! 오, 내가 저 손에 낀 장갑 되어 그녀 뺨을 만져나 보았으면!” (52쪽)

간지러운 사람은 몸을 좀 긁어도 좋겠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지나치게 진지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대대로 원수인 집안의 아들과 딸,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 끓어오르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장애를 만났을 때, 진정으로 치열해진다. 창문에 기댄 줄리엣은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대사를 던진다.

“오,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53쪽)

줄리엣에게 로미오는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 완벽한 연인이다. 줄리엣의 혼잣말을 들은 로미오는 이렇게 말한다. “성자시여, 제 이름을 제가 미워합니다.” 달콤한 말들의 오고 감, 말들의 왈츠, 치고 빠짐, 나타나고 사라짐!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 연인이 나누는 대화의 완벽한 앙상블! 이 묘미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야 한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한 장면. 지독한 반대를 겪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전이다.

지독한 반대를 겪는 연인들의 이야기, 그 모태는 모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전은 시간과 역사, 창작자의 다양한 시도와 새로운 해석을 감당한다. 원작을 토대로 수많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발레, 오페라, 소설 등이 변주되어 나왔지만 정작 원작 희곡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드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로미오와 줄리엣’ 대신 유사 ‘로미오와 줄리엣’만 감상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함축적이며 시에 가까운 대사, 인물들의 재치 넘치는 언어유희를 직접 맛봐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대사를 얼마나 통통 튀게 쓰는지, 쓸 데 없는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는지 봐야 한다. 모든 대사는 무대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 개성 있게 빛나야 한다는 걸 셰익스피어는 잘 알고 있었으리라. 특히 드라마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희곡을 정독하길 권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ㆍ최종철 옮김 
 민음사 발행ㆍ188쪽ㆍ7,000원 

“셰익스피어는 2만개가 넘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열두 단어당 하나꼴로 단어를 지어냈다. 적어도 그 단어들이 셰익스피어 이전에 사용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이에 비해 킹 제임스 성경에는 8000개 남짓 되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제임스 설터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424쪽)

대사는 무대에서 조명보다 더 빛나야 한다는 것, 스토리를 누추하지 않게 만드는 빛나는 옷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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