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대한민국 경주시장을 위한 변명

입력
2020.06.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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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의 자매도시인 일본 나라시의 나카가와 겐 기장이 경주시가 보낸 방역물품 상자들을 배경으로 팻말을 들어 보이며 사의를 표시하고 있다. 경주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지난달 마스크와 보호복, 고글 등 방역물품을 일본의 자매ㆍ우호협력 도시들에게 전달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북 경주시의 자매도시인 일본 나라시의 나카가와 겐 기장이 경주시가 보낸 방역물품 상자들을 배경으로 팻말을 들어 보이며 사의를 표시하고 있다. 경주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지난달 마스크와 보호복, 고글 등 방역물품을 일본의 자매ㆍ우호협력 도시들에게 전달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 왔다. ‘경주시장 주낙영의 해임건의를 간곡히 청원합니다!’ 11일 현재 10만3,500여명이 서명했다. 추천순 3위의 ‘핫’한 글이다. 각 부처나 기관의 장, 청와대 수석 등의 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추천 요건을 채워야 한다. 또 지방자치단체 고유 업무에 해당하는 내용일 경우 중앙 정부나 청와대는 청원에 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청원의 논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전국민이 재난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경주시장이 일본에 방역물품을 지원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직장인들은 일거리가 없어 무급휴가로 내몰리고, 소상공인들은 연일 폐업하고 있다’, ‘경주시의 경제와 시민을 위해 일해야 할 시장이 피눈물 같은 세금을 일본이라는 엉뚱한 곳에 갖다 바치고 있다’는 설명도 붙었다. 여기에 ‘시장의 오만 독단 행정으로 경주시민 전체가 싸잡혀 비난 받고 있고, 경주 관광 보이콧이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도 눈에 띈다. 같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나아가 일부 언론까지 나서 반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 굳이 그런 일을 했어야 했느냐며 몰매를 때렸으니, 주 시장이 더 이상 버틸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경주시는 모든 추가 지원 계획을 취소했다. 그제서야 들끓던 여론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만 주 시장은 꼬리를 내린 뒤에도 가만 있지 않았다. “평생 먹을 욕을 하룻밤 사이 다 먹은 것 같다”며 억울한 심정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토해냈다. “전쟁 중인 적에게도 인도주의적 지원은 하는 법이다”, “2016년 지진으로 우리가 어려울 때 일본 자매도시에서 도움을 받았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지원이었다”며 해명하기도 했다. 또 “경제대국 일본이 비닐 방역복, 플라스틱 고글이 없어 검사를 제 때 못하고 있는데, 이럴 때 대승적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게 문화대국인 우리의 아량이고, 일본을 이기는 진정한 길이 아니겠냐”고 되묻기도 했다. 완곡했으나 격정은 고스란히 묻어 났다. 주 시장의 글 역시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주시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 이란 페루 프랑스 등 전세계 9개국 18개 도시와 자매결연이나 우호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17개 광역시ㆍ도와 226개 기초 지방자치단체들로 확장을 하면 그 무대는 작년 말 기준, 전세계 82개국 1,291개 도시에 이른다. 아무리 날고 뛰는 ‘지방 외교’ 또는 ‘도시 외교’라고 해도 국익과 안보를 우선으로 한 국가 외교에 비하면 ‘2부 리그’이고, 그 기능도 어디까지나 국가 외교의 보조에 국한될 테다. 하지만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들이 하고 있다는 점에선 단순한 ‘보조’로만 보면 곤란하다.

호주 블랙타운시는 일본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자매도시 대구 수성구의 요청에,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추모비를 블랙타운 국립공원에 설치했다. 인천시의 자매도시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는 크론슈타트항구에 ‘인천광장’을 조성, 태극기를 걸어놓고 있다. 한국 정부의 후방 지원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지자체 외교가 해낸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박원순 서울시장은 중국 웨이보에 ‘중국 힘내라’는 동영상 메시지를 보내 중국 옌청시(구로구 자매결연) 시장의, “한국인을 차별 않겠다”는 소신 선언을 이끌어 냈다. 한국발 입국자 강제 격리가 시행되던 때로, 우리 외교부가 국민들의 뭇매를 맞고 있던 시기다.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각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얼굴을 붉힐 때, 또 지구촌이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 들었을 때도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이들이 바로 경주시와 같은 지방 정부들이다. 대한민국에 더 많은 ‘경주시장’이 나와야 할 이유들은 적지 않다.

정민승 지역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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