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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부색 관계 없이 존중”…흑인들이 엄마처럼 따른 홍정복씨 
 무장 강도에 피살…“살인마 찾아 대가 치르게” LA 울린 죽음 
아시아계 미국인 관련 잡지 코레암 저널이 흑인들의 요청으로 이뤄진 한인상점 주인 홍정복씨의 지역사회장 장례식을 다루며 그를 기리는 사진을 실었다. 코레암 저널(KoreAm Journal) 캡처

미국 인종차별 항의시위가 격렬해 지면서 많은 상점들이 피해를 입고 있죠. 이미 한인상점 150여곳이 약탈당했고, 최근엔 한 흑인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노인을 폭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요. 이번 사태를 두고 과거 백인의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돼 한인-흑인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번졌던 1992년 ‘LA폭동’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당시 한인타운 대부분이 파괴되고 타버리는 등 쑥대밭이 됐죠. 그때 흑인들이 직접 나서서 보초를 서면서까지 지켰던 한 한인 상점이 있어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있는데요. 이 가게의 주인은 바로 인근 주민들에게 ‘마마(Mama)’로 불렸던 홍정복씨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은 듯 증오와 분노가 만연한 오늘, 홍씨를 다시 기억에 새기려 합니다.

 차별 없는 친절에 ‘마마’라 불려…가게는 LA폭동서 홀로 살아남아 
홍씨가 사망한 후 그가 운영하던 가게 ‘밴네스 스토어’ 앞에 추모의 마음을 담은 꽃과 양초, 편지들이 놓여있다. KBS 뉴스9 캡처

홍씨는 LA에서도 대표적 흑인 거주지역인 사우스 센트럴에서 가족과 함께 작은 환전소 겸 식료품점인 ‘밴네스 스토어’를 운영하던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1971년 미국에 이민을 가 간호사 보조로 일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남편, 두 자녀와 함께 15년 동안 가게를 꾸려왔는데요. 인근 주민이라면 홍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특히 흑인들은 그를 엄마처럼 따랐습니다. 차별을 모르는 따듯한 그의 인성에 ‘마마’라는 별명이 붙었죠.

그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면모가 있었는데요. 친절이 남달랐다는 점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말하는 당시 일화를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돼 아이 기저귀와 우유를 살 돈이 없는 여성이 망설이고 있자 홍씨는 가방에 물건들을 챙겨주고 귓속말로 “돈은 다음에 주세요”라 말하고 돌려보냈다고 하는데요. 감동한 이 여성은 이후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맥주 캔을 훔쳐 달아나는 청년의 뒤에 대고는 “조심해, 넘어질라”라고 걱정의 말을 건넸고요.

한번은 가게를 찾은 한 남성이 생계 보조비로 받은 수표로 술을 사며 홍씨에게 “나머지는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술에 취한 그가 혹여 허투루 돈을 쓸까 걱정한 홍씨는 남성의 집에 전화를 걸어 부인에게 거스름돈을 직접 받아가도록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10대 흑인 청소년들이 우르르 가게에 들어와도 감시의 눈초리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해줬죠. 이러니 홍씨의 가게를 한 번이라도 찾은 사람들은 다 그를 마마라고 부르며 좋아하게 됐다고 해요.

흑인 로드니 킹 구타 사건에 대한 평결이 난 직후인 1992년 4월 29일(현지시간) 폭동이 일어난 LA 남부 중심가에서 폭도와 구경꾼들이 불타는 자동차 주위에 모여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현지 교민들에게 지금까지도 ‘4ㆍ29’로 기억되는 그 날,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이 시작됐죠. 흑인이 백인 경찰의 구타로 청각장애인이 된 로드니 킹 사건으로 민심이 폭발하던 중, 미국 언론이 갑자기 1991년 3월 16일 15세 흑인 소녀를 강도로 오인한 한인마켓 주인 두순자가 우발적으로 총을 쏴 살해한 사건을 크게 조명하면서 흑인들의 분노는 한인을 향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인 상점 2,300여곳이 파괴됐고, 피해액은 3억 5,000만 달러(약 4,112억 원)에 달했는데요.

당시 경찰은 할리우드 등 백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만 보호하고 한인타운 치안에는 손을 놓고 있었는데요. 한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옥상 위로 나서면서 ‘루프 코리안(Roof Korean)’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했죠. 이 가운데 홍씨의 가게는 LA 한인가게 중 유일하게 폭동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아 눈길을 끌었는데요.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불침번을 서면서 교대로 그의 가게를 지켜줬기 때문입니다. 당시 최고조였던 한흑 갈등을 뛰어넘은 유대감이었죠.

 흑인들 요청에 LA 지역사회장 장례…“남을 돕는 일 맡은 천사” 
본보가 1999년 2월 13일 홍씨 장례식과 관련해 보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로부터 7년이 지나 LA를 슬픔에 잠기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홍씨가 1999년 2월 3일 자신의 가게 앞에서 권총을 든 무장강도 2명에게 살해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아들도 다리를 다쳤는데요.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홍씨의 장례식은 지역사회장으로 세인트 브리지드 성당에서 치러집니다. 인근 흑인 주민들이 유가족에게 LA에서 홍씨의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벌어진 일이죠.

국내 언론은 물론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 등 현지 매체도 당시 홍씨의 부고를 크게 다뤘는데요. 홍씨의 죽음은 LA를 울렸습니다. 장례식에는 대부분 흑인들이 참석했다고 하는데요. 같은 달 11일 열린 장례식에서 단골손님이었던 LA카운티 운수국 소속 버스운전사 6명은 정복을 입고 관을 운구했고, 300여명의 흑인과 히스패닉 조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식장에는 주민들 외에 시의원 등 지역 고위급 인사와 언론사 취재진까지도 몰렸는데요.

애써 찾아왔지만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홍씨의 가게에 헌화하며 애도하기도 했습니다. ‘목요일 휴업, 마마 장례식’이라는 안내문이 붙은 홍씨의 가게 앞에는 추모의 꽃다발과 촛불, 성경책, 편지들이 쌓여갔죠. 편지에는 “당신은 남을 돕는 일을 맡은 천사였어요, 마마”,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등 생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는데요.

심지어 동네 갱단의 한 젊은이는 붉은 글씨로 “마마, 우리가 살인마를 찾아 대가를 치르게 할게요”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아울러 당시 사람들은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라는 쪽지를 두고 ‘마마를 닮은 말’이라고 평가하며 또 다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홍씨의 장례식이 1999년 2월 11일 LA 사우스 센트럴 세인트 브리지드 성당에서 지역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KBS 뉴스9 캡처

한 흑인 소년은 장례식장에서 “마마는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우리를 인간으로 대우했다”라고 말하며 울먹였는데요. 시의회가 채택한 추모성명서를 유족에게 전달한 마크 리들리 토머스 시의원은 추도사를 통해 “오늘 이 자리는 1991년 한국인 식품상이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건이나 이듬해 일어난 LA폭동 과정에서 흑인들이 한인 상점을 불태우고 약탈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광경”이라며 “한흑 관계의 전형으로 비치던 과거의 일을 씻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을 보여준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LA시의회는 홍씨를 살해한 범인에 대해 제보하는 사람에게 2만5,000달러(약 3,000만원)의 상금을 지급하는 안을 승인하기도 했는데요. LA경찰은 이후 15일만에 홍씨를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한 용의자를 체포합니다. 경찰 측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서 빠르게 용의자를 잡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했죠.

인종ㆍ성별ㆍ나이를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보여준, 그래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지금까지도 한인ㆍ흑인 사회에서 회자되는 홍씨. LA폭동 이후 2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인종차별과 폭력시위가 되풀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마’를 떠올려봅니다.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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