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아이는 웃고 우리는 운다

입력
2020.06.16 04:3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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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주니 웃더라구요.” 부모의 학대를 피해 집을 극적으로 탈출한 창녕 아홉 살 아이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돌았단다. 지역 아동보호기관 관계자의 이 한마디가 목 끝을 뜨겁게 한다. 도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아이가 웃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 것이. 아이는 지옥을 건너왔다. 부모의 야만이 아이를 처참하게 부쉈지만, 마지막 남은 웃음 한 움큼은 뺏지 못했다. 아이는 웃고 우리는 운다. 그 웃음이 고마워서 운다. 아이가 지옥 한복판을 헤맬 때, 우리는 삼시 세끼 편하게 밥 먹고 웃고 떠들다 다리 뻗고 잠들었다. 그게 미안해서 또 운다.

아이가 탈출로로 삼은 경사진 4층 빌라 지붕은, 아이에겐 천길 낭떠러지다.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했으면, 그 어린 것이 목숨까지 걸었을까.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부모에게 들킬까 봐, 큰 길을 피해 야산을 맨발로 걸어 넘었다. 아홉 살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용감했다. 이토록 대견하고 기특한 아이를 무슨 까닭에 짓밟았는가.

아이는 “큰엄마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전에 2년간 머물렀던 위탁 가정이다. 나는 이 집에서의 추억이 아이를 지옥에서 꺼냈다고 믿는다. 계부와 친모의 집에선 느껴보지 못한 환대와 존중, 그리고 안식이 있었으리라. 이 따뜻한 기억이 없었다면, 아이는 무기력하게 학대당하다 어떤 비극적 결말을 맞았을지 알 수 없다. 이 용감한 아이와 달리, 많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때문에 폭력에 순종하다 죽는다.

천안의 아홉 살 아이는 여행용 가방 안에서 숨졌다.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부모의 학대다. 아이가 본 세상의 마지막 모습은, 공포와 고통이 뒤범벅된 암흑이었다. 온몸이 저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숨이 막혀 왔을 때, 그 어린 것을 도와줄 세상의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칠흑 같은 가방의 어둠 속에서 아이는 아마도 엄마를 애타게 찾았을 것이다. 집이 안식처가 아니라, 악몽의 공장이었다. 아이는 악몽에서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부모라는 이름의 맹수가 있었고, 아이는 우리에 던져진 먹이였다. 이 넓은 세상에 아이의 영혼이 머물 곳은 단 한 뼘도 없었다.

또 한 아이가 떠오른다. 울산에 살던 이서현이다. 2013년 소풍날, 계모에게 맞아 숨졌다. 갈비뼈 16개가 부러지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사망했다. 아이는 그렇게 가게 해달라고 졸랐던 소풍을 영원히 가지 못했다. 2020년, 또 다른 서현이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왜 우리를 지키지 못했냐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이다. 한 아이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성장시키기 위해선 공동체의 지혜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뜻일 테다. 그러니 한 아이가 아프면 온 마을이 아파야 한다. 지금 어디선가 아이가 외롭게 울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아이의 눈물부터 닦아줘야 한다. 어리고 약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도덕은 파산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넬슨 만델라의 말이다.

창녕의 아이가 위탁 가정으로 돌아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세계적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도 끔찍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창녕의 아이도 부디 장밋빛 미래를 만나길 바란다. 어린 꿈들이 세계를 만든다. 아이를 학대하는 건, 그 꿈들을 지우고 훼손하는 만행이다. 그 꿈이 없으면 이 세계는 한 줄 추문일 뿐이다.

탈출구 없는 아이들의 비명이 지금도 어디선가 터져 나오고 있을 것이다. 지혜를 모아 아동보호망을 촘촘히 하고 사회적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 우리 곁에 이 지옥이 있는 한, 우리 또한 멀쩡한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아이였다. 아이를 지키는 건 우리 모두를 지키는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 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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