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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독립 다큐멘터리 개척자 김동원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철거 현장 등 사회 어두운 곳에 카메라를 비추면 독립 다큐멘터리 영역을 개척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는 80년대와 그 이후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아직도 절망이 넘쳐난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김동원 감독 발언, 김영진 저 ‘평론가 매혈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대부’ 김동원 감독은 1955년 2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북 강계 출신이었던 부모님은 해방 후 월남했는데, 아버지는 사업으로 대리석 광산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고려대 의대의 모태가 된 수도여자의대를 나와 산부인과 개업의가 되었다.

부유한 집안의 맏이로 문화적 수혜를 누리며 자랐던 그는 중학생 때 사진에 매혹을 느껴 카메라를 들고 돌아 다녔다. 경기고 재학 시절에는 아마추어 밴드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는데 마마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열창하며 여고생들의 펜 레터를 받기도 했다. 철거촌 빈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을 작업하고, 노동과 인권, 빈민과 공동체의 문제에 몰두하는 훗날의 삶과는 사뭇 대조적인 성장기였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 김 감독은 연극반 활동에 몰두했다. 신입생 때 ‘예쁜 여학생이 많다’는 말에 넘어가 발을 들였지만, 음악과 연극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선배 박준용에 감화된 그는 대학 시절 내내 극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연극반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가 배우 문성근과 탤런트 정한용이었다고 한다.

유신 정권 치하의 억압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는 대학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마초를 길러서 피우고, 두발 단속을 비웃듯 장발을 하고 다니던 반항적인 청년은 점차 현실세계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를 풍자하는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리며 숨통을 트곤 했다.

상계동 철거 현장을 기록한 '상계동 올림픽'은 국내 독립 다큐멘터리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푸른영상 제공
 
 ◇‘바람불어 좋은 날’로 눈뜬 영화 

‘이장호 감독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이 감독은 70년대부터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영화에 새바람을 몰고 왔고 1980년대엔 ‘바람 불어 좋은날’(1980),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4), ‘어둠의 자식들’(1981) 등 사회성이 가미된 영화를 만들고 계셨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밑에서 배우려고 줄을 서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더 큰 행운은 ’바보선언‘(1983)의 제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한국영상자료원 2008년 8월 발행 격월간지 영화천국)

학사장교로 복무하다 제대한 김 감독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중, 명보극장에서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게 된다. 농촌에서 올라와 도시 변두리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청년들을 다룬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서 사회적, 정치적인 발화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고 김 감독은 이에 자극받았다. 교수가 되길 바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감독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그는 스스럼 없이 화천영화사를 찾아갔다. “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27세의 김동원은 대뜸 던진 이 한 마디로 마침 인원이 비어있던 ‘바보선언’의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가게 된다.

수입이라곤 한 푼 없었고 잡일을 도맡아야 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견뎌낸 시간들이었다. 충남 태안의 연포 해안에서 촬영할 때 이장호 감독의 명령에 따라 신문지를 구하러 마을까지 한 시간을 구보했는데, 그렇게 구한 신문지들은 극 중 인물들이 여관비가 없어 바닷가에서 노숙할 때 몸에 말고 자는 용으로 쓰였다. 배우 하명중의 연출작 ‘태’(1985)를 전북 부안 왕등도에서 로케이션 촬영할 때는 폭풍으로 보급선이 끊겨 쌀이 바닥났는데, 단역배우에게도 밥을 양보하느라 사흘을 굶기도 했다. ‘착한 조감독 김동원’의 평판은 충무로에 퍼져나갔고 정지영감독의 ‘추억의 빛’(1985), 선우완ㆍ장선우 감독의 ‘서울황제’(1986) 등에서도 조감독을 하며 착실히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감독으로 입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혼식장 비디오를 찍는 일로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는 틈틈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지만, 영화사에 들고 가면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 맞기 일쑤였다. 서강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상임연출로 일하게 된 김 감독은 첫 연출작으로 단편영화 ‘야고보의 5월’(1986)을 내놓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은 극영화였지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1986년 10월 늦가을, 감독 지망생 김동원의 삶은 크나큰 운명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다큐멘터리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김동원 감독의 최근작이다. 김 감독은 정일우(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신부의 요청으로 상계동 철거 현장을 촬영하다가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게 된다. 푸른영상 제공
 
 ◇상계동에서 바뀐 인생 

“내가 ‘가난’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상계동 철거민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난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책으로만 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포크레인을 앞세워 집을 부수는 빨간 모자를 쓴 철거 깡패들, 그 포크레인 밑으로 몸을 던져 철거를 막으려던 주민들,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아이들... 이런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단지 이사 갈 수 없는 세입자란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재개발은 올림픽과 도시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벌과 정부의 땅투기, 집 투기라는 사실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세상 – 행당동 사람들 2’(1999) 연출 노트, 격월간지 아웃사이더 2001년 4월호)

당시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등지는 88서울올림픽 시일에 맞춰 달동네 재개발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빈민가 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입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있던 정일우 신부(이때의 인연으로 김동원은 ‘내 친구 정일우’(2017)를 만들게 된다)는 재판 자료로 제시하기 위해 판자촌과 파손된 가재도구를 찍어줄 것을 요청했고, 카메라를 들고 상계동으로 간 김 감독이 목격한 건 “9월에 1분도 안 되는 성화 봉송을 위해, 1월부터 40세대 200여 명이 떨어야”(‘상계동 올림픽’ 내레이션)하는, 올림픽의 이면에서 자행되고 있던 국가 폭력의 현실이었다.

하루만 스케치하듯 하고 떠날 작정이었던 촬영은 3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상계동에서 명동성당을 거쳐, 부천으로 강제 이주 당한 주민들의 발자취를 생생히 담게 되었다. 그렇게 시대의 저주받은 이들을 조명한 27분짜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은 1989년 제3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과 1991년 제2회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는 개가를 올렸고 한국 영화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야마가타영화제에 참석한 김 감독은 영화제의 창립자이자 농민들의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그린 ‘산리즈카’ 7부작(1968~1977)을 만든 일본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오가와 신스케를 만나게 된다. 작품의 기획과 제작비 조달, 제작과 상영 등 일체의 과정을 운동의 주체들과 협업하는 그의 자주제작 방식은 김 감독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귀국한 그는 주변 동료와 후배들을 모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다큐 공동체 푸른영상을 발족시킨다.

김동원은 ‘상계동 올림픽’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철거지역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을 포착한 ‘행당동 사람들’(1994)과 ‘또 하나의 세상 – 행당동 사람들 2’을 발표했고.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다룬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으로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서 운파상을 수상한다. 매춘 관광의 실상을 다룬 변영주 감독의 데뷔작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 또한 푸른영상의 제작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 김동원 감독은 이념을 넘어 비전향장기수의 신념과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바라본다. 푸른영상 제공
 
 ◇이념 대신 사람에 초점 

“다큐멘터리를 해나가는 힘은 희망입니다. ‘이것보다는 좋은 세상이 있을 거야. 지금은 힘들어 보이지만 언젠가 좀 더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이요. 희망을 찾는 걸 포기하지 마세요. 세상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다큐를 하든 뭘 하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다큐멘터리는 사람에 대한 희망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이에요.”(김 감독 발언, 형대조 저 ‘다큐멘터리 현장을 말한다.’)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과 아웃사이더의 삶에 초점을 맞춰온 김 감독의 작가주의는 ‘송환’(2003)으로 그 정점을 맞는다. 1992년 봄, 천주교 도시빈민회에 가입해있던 김 감독은 송경용 신부의 부탁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소하는 비전향 장기수 노인 김석형과 조창손을 봉고차로 데리러 갔다. 그 중 조창손이 감독이 사는 봉천동 산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가 북송되는 2000년 9월까지의 일상이 500여개의 테이프에 담긴 800시간의 기록이 되었다.

11년간의 끈질긴 작업 끝에 148분으로 완성된 ‘송환’은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분단 현실의 이면에 감춰져 온 인간의 진솔한 얼굴을 들추어낸 걸작이었고, 2004년 제20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한다.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김 감독의 신념이 세계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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