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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제주도청 앞에서 선흘2리 대명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도가 해당 사업을 불허할 것을 촉구했다. 김영헌 기자

자전거가 없었다. 지하철역 버스 정류소 앞. 자전거를 묶어 놓았던 표지판 기둥에는 자물쇠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배우 정우성이 멋진 슈트를 입고 출근하는 어느 광고를 보고 산 자전거였다. 바람을 가르며 맵시 있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출근길은 오르막길이었고 내 양복은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로망을 이어 나가고 있던 2004년 6월의 어느 아침, 나는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로망이 담긴 자전거였지만, 나는 자전거 찾는 일을 포기했다. 대한민국 경찰력이 싸구려 자전거 찾기에 수사력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거니와, 찾더라도 그것이 내 자전거인지 알아 보고 증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내 자전거는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물건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제 장황하게 도둑맞은 자전거 얘기를 꺼내는 까닭을 말해야겠다. 그 이유는 얼마 전 한 신문에 실린 글을 읽다가 내게 도둑맞은 것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제주도지사가 쓴 ‘거주 불능의 지구를 넘겨줄 수는 없다’는 비장한 제목의 글이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제목만 보고는 어느 생태환경운동가의 글을 기대했으니까. 뭐랄까, 뉴욕타임스에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라는 기고문이 실렸는데 그 필자가 트럼프인 느낌? 아니면 전위 예술을 봤을 때의 충격? 뒤샹이 전시회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고 명명했을 때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말은 ‘선언’하는 행위로서 세상을 바꾼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관의 말 한마디는 살아 있는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렇듯 말은 곧 행위이며 이 행위들은 모여서 사회를 주조한다. 다만 말이 행위가 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말하는 이의 자격이다. 파면을 선고하는 이가 재판관이 아니라 법복을 훔쳐 입은 법대생이라면 우리는 그 재판을 가짜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자격은 비단 제도와 법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환경운동에 헌신한 이가 거주 불능의 지구를 넘겨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세상의 변화를 절박하게 요구하는 행위이자 경고가 된다. 그러나 개발지상주의자가 거주 불능의 지구를 운운할 때 그 말은 도둑맞은 말이 된다. 이 도둑맞은 말은 행위로 작동하지 않는다.

도지사의 ‘말할’ 자격을 따지기 전에 전설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대대로 제주의 도지사들은 부임 첫날 귀신을 만나는 아랑 전설의 수령들처럼 귀신이 들린다. 이른바 개발 귀신이다. 지금 도지사의 상태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책임지고 있는 섬에 어떤 수식을 붙일 수 있는지 보자. 처리 능력이 없어서 필리핀에 불법 쓰레기를 수출하고, 오폐수를 그대로 바다로 흘려보내는 제주, 지하수가 만들어지는 지형 위에 콘크리트를 발라 공항을 세울 예정인 제주, 도로를 확장한다며 숲을 밀어 버리는 제주, 아, 동물을 위한 배려도 있다. 중산간 지역에서 살던 동식물들을 쫓아내고 동물원이란 이름의 감옥을 지으려는 제주. 거주 불능의 제주.

나는 지구적으로는 생태주의자이고, 지역적으로는 개발지상주의자인 도지사의 진심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의 말이 도둑맞은 말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언어시장에서 잘 팔리는 담론을 자신의 몫으로 챙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좌우’를 뛰어넘는 생태주의자이자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라는 상징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말’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디에나 널려 있는 공공재인 언어인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말을 훔친 것이 아니다. 그가 훔친 것은 자신의 말을 평생의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의 삶과 진심이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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