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황동혁 앞에 김승옥이 있었다

박찬욱, 황동혁 앞에 김승옥이 있었다

입력
2022.07.09 12:01
수정
2022.07.13 12:3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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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헤어질 결심'은 국내외 여러 고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CJ ENM 제공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헤어질 결심'은 국내외 여러 고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CJ ENM 제공

최근 1, 2년 동안 본 영화들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삭제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인상은 그만큼 강렬했다. 고전의 향취가 느껴지면서도 장면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칸영화제에서 첫 대면하고 귀국해서 한 차례 더 봤는데도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녀 주인공의 농밀한 사연이 빚어내는 슬픔에 가슴이 흔들렸고, 할리우드와 프랑스, 일본, 한국 고전 영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여러 소설과 영화가 ‘헤어질 결심’에 영감을 줬다. 박찬욱 감독은 스웨덴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예의 바르고 품위를 강조하는 형사 해준(박해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영국 영화 ‘밀회’(1945)와 한국 영화 ‘안개’(1967) 역시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밀회’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유부남, 유부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다. 해준과 서래(탕웨이)의 위태로운 사랑만으로도 ‘밀회’의 그림자를 감지할 수 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안개가 ‘밀회’의 화면에 서린다. 안개가 지배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헤어질 결심’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김수용 감독의 ‘안개’는 보다 다양한 지점에서 ‘헤어질 결심’과 맞닿아 있다. ‘헤어질 결심’을 관통하는 노래 ‘안개’는 영화 ‘안개’에 쓰였다. 유명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가 작곡한 노래는 가수 정훈희가 처음 불러 크게 히트했고, 이후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박 감독은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안개’를 특히 좋아했다”며 “정훈희가 부르는 ‘안개’로 시작해 송창식의 ‘안개’로 끝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박 감독의 계획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른 ‘안개’로 끝난다(두 원로가수는 ‘헤어질 결심’을 위해 따로 노래를 녹음했다). 영화 ‘안개’와 ‘헤어질 결심’은 내용에서 닮은꼴이기도 하다. ‘안개’는 바닷가 소도시 고향을 찾은 한 유부남이 우연히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영화 ‘안개’는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밑그림으로 삼았다. 1963년 선보인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사 최고 단편으로 꼽히고는 한다. 김 작가를 호명할 때마다 한 묶음처럼 소환된다. 무진은 안개 무(霧)와 나루 진(津)으로 조어한, 상상 속 도시다. 소설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배금주의의 부상 등 혼란스러운 당대 시대상이 스며 있다. 박 감독은 ‘무진기행’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소설이 ‘헤어질 결심’에 드리운 그림자는 넓고도 짙다.

무진은 지난해 세계를 뒤흔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기훈(이정재)과 상우(박해수) 등이 의문의 생존 게임이 펼쳐지는 무인도로 향할 때 거치는 항구가 무진항이다. 공간을 이동하면 안갯속처럼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고, 항구 이름이 은근히 암시한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영화 ‘도가니’(2011)에서 무진시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공지영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 속 무진시를 그대로 사용했다. 59년 전 세상에 나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잊혔다 여겨진 짧은 소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무관할 듯한 ‘헤어질 결심’과 ‘오징어 게임’에 드리운 ‘무진’은 고전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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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한국일보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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