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에라자드의 딸'들의 외줄타기

입력
2022.11.14 04:30
수정
2022.11.14 23: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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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cha Chenna(1941.8.14~2022.9.25)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 모로코는 혼전 성관계를 형법상의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다. 특히 여성은 가족과 사회부터 사실상 배제당하는 가혹한 불이익을 당하고, 그들이 출산한 아이들은 숱하게 버려지거나 고아원의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해야 한다. 공무원 신분의 간호사 겸 사회활동가 아이샤 셰나는 1959년부터 평생, 국가와 사회가 외면해온 그 여성과 아이들의 존엄과 자립(생존)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숱하게 좌절했지만 말년의 그는 외롭지 않았다. femmesdumaroc.com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 모로코는 혼전 성관계를 형법상의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다. 특히 여성은 가족과 사회부터 사실상 배제당하는 가혹한 불이익을 당하고, 그들이 출산한 아이들은 숱하게 버려지거나 고아원의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해야 한다. 공무원 신분의 간호사 겸 사회활동가 아이샤 셰나는 1959년부터 평생, 국가와 사회가 외면해온 그 여성과 아이들의 존엄과 자립(생존)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숱하게 좌절했지만 말년의 그는 외롭지 않았다. femmesdumaroc.com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Scheherazade)가 벌인 목숨 건 외줄타기는 ‘샤리아(이슬람 종교법)적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 여성들이 지금도 감당하는 질곡이다. 온갖 뜨겁고 실험적인 성애와 범죄적 상상력으로 상대의 숨결은 헐떡이게 하면서도 자신의 맥박은 잔잔히 다스려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옛 페르시아 여인의 처지가 지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칸 등 대다수 이슬람 국가와 소말리아, 수단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지나(Zina, 간통과 결혼 전 성행위)’를 종교 율법과 형법으로 처벌하고, 사우디 등 일부 국가는 사형(투석형)까지 부과할 수 있는 중죄로 다스린다. 관습적 처벌도 있다. 불이익은 여성에게 특히 가혹해서 성차별-억압의 주요 방편이다.
북아프리카 입헌군주국 모로코도 그중 한 곳이다. 유럽(프랑스) 지배를 오래 받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인 데다 카사블랑카 등 유명 관광지를 여럿 품고 있어 서구의 개방적 문화가 이미 일상에 스며 있고, 1999년 집권한 현 국왕 무함마드 6세의 근대화-민주화 정책으로 정치-사회적 자유도 비교적 폭넓게 보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왕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절대자이고, 원리주의적 이슬람 종교권력의 영향력도 드세다. 모로코 형법 490조는 간통이나 혼전 성관계를 한 자에게 6개월에서 최대 3년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한해에만 1만4,503명(2018년 기준)이 저 법으로 기소되고 있다.

모로코인은 중동 아랍 민족과 다른 베르베르 유목민족의 혈통을 부각하며 스스로를 ‘아마지그(Amazigh, 자유로운 사람들)’라 칭한다고 한다. 근년 인구는 약 3,800만 명 . 그중 63%가 넘는 약 2,400만 명(2022년 1월 기준)이 SNS 계정을 보유하고 있다. 진학과 취업을 위해 도시로 나온 가난한 시골 청년들이 도심 변두리 곳곳에서 드물지 않게 동거도 하는 현실과 커플이 숙박업소에 들 경우 혼인 증명서를 요구 받고 미혼 여성이 임신이나 성관계 관련 질병 진단을 받으면 의사에 의해 고발 당할 수 있는 현실이 공존한다.
섹스 중독에 시달리는 한 여성의 성적 욕망을 파격적으로 드러낸 2014년 소설 ‘그녀, 아델’과 2016년 ‘달콤한 노래’로 공쿠르상을 받은 레일라 슬리마니(Leila Slimani)가 모로코 출신이다. 그는 성을 모티브로 조국의 열악한 여성 인권을 폭로한 논픽션 ‘섹스와 거짓말’(이현희 옮김, 아르테)에서 “성적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섹스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박의 대상이 된다”고 썼다.

모로코 가족법 개정(2004) 10주년이던 2014년 2월, 혼전 성관계 등을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 490조 등의 악법 개정을 촉구하며 시위에 나선 모로코 여성 등 시민들. AFP 연합뉴스.

모로코 가족법 개정(2004) 10주년이던 2014년 2월, 혼전 성관계 등을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 490조 등의 악법 개정을 촉구하며 시위에 나선 모로코 여성 등 시민들. AFP 연합뉴스.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당시 평균 17세(남성은 24세)였던 여성 초혼 연령은 2018년 기준 25.5세(남성 31.9세)로 높아졌고, 30~34세 여성 약 1/4이 여전히 미혼이다. 그들은 연인과 잠자리에 들려면 징역살이와 사회적 낙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의 위계도 성적 지위에 따라 나뉜다. 아들을 둔 어머니가 맨 위에 있고, 아래로 과부- 이혼 여성- 독신 여성으로 이어지며, 미혼모는 법적 전과자이자 매춘부와 다를 바 없는 윤리적 낙인이 찍혀 가정과 사회로부터 배제되곤 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 역시 고아원에 맡겨지거나 유기된다. 모로코의 버려지는 아이는 한 해 평균 6,000여 명에 이른다.
미혼모의 사연이 모로코라고 특별할 건 없다. 기만의 러브스토리, 약혼- 결혼의 배반, 강간이 주된 원인. 가난한 가정에서 어린 딸을 도시 가정부 등으로 파는 예가 지금도 빈번하다. “읽고 쓰는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성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이 도시로 팔려 나온 아이들은 일터에서 예사로 성추행이나 강간을 당하고, 남자의 달콤한 약속에 쉽사리 넘어가곤 한다. 그러다 임신을 하면 남자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것이다.”

모로코 간호사 아이샤 셰나(Aicha Chenna, 1941.8.14~2022.9.25)에게 그렇게 버려진 아이와 여성들은, 신의 부재나 신의 말씀을 실천해야 할 인간의 부재를 비추는 텅 빈 거울이었다. 신의 광휘를 업고 신의 말씀을 그림자처럼 좇으며 하즈(메카 성지순례)까지 실천한 셰나는 그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만 18세 되던 1959년 복지부 소속 간호사 겸 사회복지사로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해, 사회적 금기였던 ‘가족계획(피임, 임신중단)’을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고, 종교권력과 부단히 불화하며 85년 이슬람권 최초 미혼모 복지단체 ‘여성연대협회(ASF; Association Solidarité Feminine)를 설립해 숨질 때까지 이끌었다. 그는 자신(들)의 사명과 활동을 수혜-시혜의 자선이 아니라 신앙의 실천이라 여겼다.
셰나의 활동은 90년대말에야 모로코 바깥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다수의 상과 상금을 받았고, 상금은 협회 운영자금으로 썼다. 노벨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가 2004년 한 인터뷰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는 아이샤 셰나가 별세했다 항년 81세.

셰나는 2009년 버클리센터 인터뷰에서 복지사 시절, 아이 양육포기각서에 서명하려고 찾아온 한 어린 미혼모의 기억을 되새겼다. “수치심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그 여성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해 서명 대신 지장을 찍으면서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어요. 다른 복지사가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는 순간 젖이 아이 얼굴에 물총처럼 뿜어져 나왔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얼굴을 그 미혼모는 속절없이, 절망스럽게 바라보기만 했어요. 당시 저도 젖먹이를 키우던 때여서 그 산모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죠. 제가 뭘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래도 뭐든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그 순간 들었어요.” 그는 그런 순간들이 이후로도 너무 많았다고, 그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주었다고 말했다.

미혼 여성이 출산한 아이는 출생신고도 할 수 없던 때였다. 아이들은 버려져 숨지거나 고아원에 수용됐고, 당연히 학교도 갈 수 없었다. 고아원 환경도 열악해 성년에 이르지 못하고 숨지는 예가 부지기수였다.
법과 제도 때문에 공무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린 산모와 면담해 아이 아버지를 수소문해 설득하고 딸을 내쫓은 부모를 회유하는 일이, 그가 일상 업무 외에 할 수 있는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해서 출생증명서라도 얻어야 아이가 교육이나마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로코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펴던 가톨릭 수녀회가 그를 도왔다.

모로코 정부는 2004년에야 가족법을 개정, 혼외 임신- 출산아의 생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산모가 아이의 성(姓)을 선택해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했다. 기혼여성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전 국민 인구조사가 시행된 1984년, 카사블랑카에서 제4차 이슬람국가정상회담이 열렸다. 사회복지사인 그도 거리의 노숙자 등을 관리하는 일에 동원됐다. 자신의 업무가 인구조사와 관련된 것으로 알던 그는 뒤늦게야 국제행사를 위한 거리정화사업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수용소의 노숙자 처우는 끔찍했고, 다수가 여성이었다. 함께 일하던 한 유대인 남성이 그에게 “일단 증인이 되세요. 그게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훗날 그 남성은 스위스에 본부를 둔 홈리스 국제구호단체(Terre des Hommes) 모로코 지부를 설립해 이끌었다.

아이샤 셰나는 1985년 이슬람국가 최초의 미혼모 복지단체인 '여성연대협회'를 설립했다. 미온모가 일할 수 있도록 낮동안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로 시작된 협회 업무는 최장 3년 직업교육과 자립 사업장 운영 등으로 확대됐다. The Opus Project.

아이샤 셰나는 1985년 이슬람국가 최초의 미혼모 복지단체인 '여성연대협회'를 설립했다. 미온모가 일할 수 있도록 낮동안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로 시작된 협회 업무는 최장 3년 직업교육과 자립 사업장 운영 등으로 확대됐다. The Opus Project.

셰나는 1985년 자원봉사자 두 명과 함께 카사블랑카의 한 종교시설 지하실에서 ‘여성연대협회’를 창립했다. 여전히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미혼모- 아동 구호 기획안을 올려본들 반려될 게 뻔했다. 몰래 출산한 미혼모들이 낮에 노동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돌봐주는 주간 탁아소로 시작된 협회 일은 점차 미혼모 직업교육 등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오래 알고 지낸 프랑스인 수녀(Marie-Jean Tinturier)와 홈리스 단체 등이 그를 도왔다.

그와 협회는 이슬람 종교단체 등의 거센 비난과 반발을 샀다. 성적 타락과 위법행위를 부추김으로써 무슬림 문화와 공동체의 기틀을 훼손한다는 거였다. 셰나의 대답은 늘 “나는 무슬림의 심장에 세속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거였다. “나도 무슬림이고, 신앙인이다. (…) 하지만 배타적인 신- 모로코인만의 신, 무슬림만의 신-은 믿지 않는다. 오직 신이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는 가톨릭 수녀와 유대인 의사의 도움을 받으며 서로 협력한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신은 모두를 위한 존재라 믿으며,(…)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슬림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는 일이라 믿는다. 믿음을 잃고 절망에 빠져 우리를 찾아온 그 어린 산모들에게도 신앙은 중요하다.”

셰나는 2000년 종교적 사형선고(파트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난관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결코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자리를 ‘칼날 위’에 비유하곤 했다. 종교 권력과 무슬림 정서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면서 여성-아동들의 존엄과 생존권을 지탱해야 하는, 삐끗하면 다칠 수 있는 자리. 비유하자면 셰에라자드의 자리.

선친인 하산 2세(1961~99년 재위)의 권위주의 독재 권력을 물려받아 개혁과 자유화를 추진해온 현 국왕 무함마드 6세가 술탄 군주제에 반대하는 공화파 개혁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개척해온 세속화의 길도, 본질적으로는 셰나의 길과 유사했다. 셰나의 활동이 알려진 90년대 이래 모로코 왕실은 ‘협회’를 재정적-행정적으로 지원했다. 협회는 여성-아동 수용시설이 없는 대신 여성들의 주거 임대를 지원하고, 미용 요리 등 직업 훈련과 법률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86년 카사블랑카 빈민가에 미혼모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열었고, 2004년에는 왕실 등의 후원을 받아 자체 스파-피트니스 시설도 마련했다. 개장식에는 왕비 살마(Lalla Salma)가 참석했다.

아이샤 셰나는 2차대전 중이던 1941년, 프랑스 보호령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3세 무렵 아버지와 여동생을 잇달아 폐결핵으로 잃었다. 5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가족은 마라케시로 이주했고, 양부는 13세 된 셰나에게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 모로코 독립운동이 거세지면서 그 반작용으로 프랑스 식민정부와 당국의 보수화 압력이 강화되던 때였고, 여성들은 전신을 가리는 로브와 베일을 다시 강요당했다. 어머니는 남편 몰래 셰나를 카사블랑카 외삼촌 집으로 보내 프랑스계 선교사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했다. 55년 이혼한 어머니는 반지를 팔아 셰나의 학비를 댔지만, 다시 시련이 닥쳤다. 사촌 중 한 명이 셰나와의 사실상 강제결혼을 요구한 거였다. 다시 도망치듯 집을 떠나 살 길이 막막했던 셰나는 한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 간호조무사 일을 하게 됐고, 그의 총명함과 성실성을 눈여겨본 의사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며 정식 간호사시험을 치를 수 있게 도왔다. 그는 그렇게 간호사가 됐고, 사회복지사가 됐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받은 그 도움들이 셰나에겐 신의 존재 증명이었고, 그 형식이 세속적 연대였다. 그는 “누구나 가슴속에 촛불 하나쯤은 품고 산다”는 말로 연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피력했다.

"당신이 저항을 시작하면, 당신처럼 저항적인
다른 여성을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Aicha Chenna, dofen.news

그는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의 사연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고백한 책 ‘Miseria’를 1996년 출간해 그해 모로코 주재 프랑스 대사관 인권상을 수상했고, 책은 아랍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다. 2009년 미국의 가톨릭 오푸스 재단이 주는 ‘오푸스(Opus)상’도 받았다. 종교적 헌신을 통해 가난과 질병, 불의에 맞서 약자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그 상을 받은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2013년 프랑스 정부는 레종도뇌르를, 지난해 세계은행은 ‘사회적 책임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 어워드’를 수여했다.
2007년 암 선고를 받은 셰나는 기도로 신과 협상을 했다고 한다. “만일 나를 살려준다면, 다른 누군가가 내 일을 이어 할 수 있게 하는 데 남은 생의 3/4을 바치겠다”고. 오푸스상 상금 100만 달러도 그렇게 쓰였다.
모로코 인권단체와 일부 정치인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법 490조의 서슬은 지금도 시퍼렇다. 낙태를 조장하거나 조장할 우려가 있을 경우 벌금과 함께 1~5년 징역형(449조), 낙태를 시행한 여성은 6개월-2년형(454조), 낙태를 알선하거나 도구를 판매해도 2개월~2년형(455조)을 받을 수 있다.

모로코의 전통 가옥은 커다란 방 하나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형태여서 결혼 전 연인들이 함께 시간 보낼 곳이 드물다고 한다. 후미진 공원이나 숲속을 찾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리기 일쑤이고, 뇌물로 무마하지 못한 이들은 범죄자가 된다. 그렇게 기소된 이들이 연 평균 1만5,000명에 달한다. 사진 속 저 모로코 연인이 부부인지는 알 수 없다. flickr 사진.

모로코의 전통 가옥은 커다란 방 하나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형태여서 결혼 전 연인들이 함께 시간 보낼 곳이 드물다고 한다. 후미진 공원이나 숲속을 찾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리기 일쑤이고, 뇌물로 무마하지 못한 이들은 범죄자가 된다. 그렇게 기소된 이들이 연 평균 1만5,000명에 달한다. 사진 속 저 모로코 연인이 부부인지는 알 수 없다. flickr 사진.

2018년 8월 만 28세 여성 기자(Hafida Bachir)가 수단인 약혼자와 산부인과에 갔다가 잠복 경찰에 체포돼 둘 다 혼전 성관계 혐의로 1년형(의사는 2년형)을 선고 받았다. 1971년 프랑스 여성 343명이 ‘누벨옵세르바퇴르’에 자신들의 낙태 경험을 공개한 것처럼, 형법 490조에 대항하는 상징적 의미로 모로코 시민과 명사 등 490 명이 기자 구명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혼외 성관계 사실을 고백하는 문건에 연대서명하기도 했다. 국왕은 사면령으로 형법 개정을 회피했다.
불법낙태는 비용도 많이 들고 훨씬 위험하지만, 한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600~800건의 불법 낙태가 마그레브 지역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 9월에도 모로코 미델트(Midelt)의 만 15세 소녀가 불법 낙태 수술 부작용으로 숨졌다. 2021년 3월에는 전 남자친구가 동의 없이 퍼트린 성관계 영상때문에 두 아이를 둔 젊은 이혼 여성이 벌금(45유로)과 1개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셰나의 말년 최대 관심사는 청소년 학교 성교육이었다. “실수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학교 성교육은 필요하다. 우리는 어린 여성과 남성들, 불법 낙태 시술로 적발된 의사들을 가둘 감옥이 아니라 학교를 더 지어야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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