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를 찍다

입력
2022.12.23 04:3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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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고 이야기를 여는 시작점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을 쓰기 위해 200번을 고쳐 썼다고 한다.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쓰지 못한 주인공은 첫 문장을 괄호로 쓰기로 하고, 마침내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장까지 단숨에 괄호로 처리한다. 첫 문장 쓰기는 그만큼 설렘이자 고통이다.

최인훈의 '광장' 초판에서는 주인공이 망명길에 바다를 보는 모습을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척이면서 숨 쉬고 있었다."로 시작했는데, 두 차례의 수정을 거쳐 첫 문장은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가 됐다.

박태원의 작품 '방란장 주인'은 원고지 약 40매 분량의 한 문장으로 구성됐다. 기나긴 문장의 전개를 위해 273번의 쉼표가 쓰이고, 끝부분도 "자기 혼자로서는 아무렇게도 할 수 없는 고독을 그는, 그의 전신에 느끼고,"와 같이 쉼표로 마친다. 첫 발표에서는 '느꼈다.'로 평범(?)하게 끝냈지만, 마침표 대신 9개 점의 말줄임표로 쓴 뒤 '느끼고,'로 최종 수정하였다.

이렇듯 문장부호는 문장을 다채롭게 한다.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막막함을 괄호의 연속으로, 눈앞에 보이는 검푸른 바다를 머뭇머뭇 쉼표로 표현한다. 또 생계가 막막한 찻집 주인은 친구의 황망한 모습을 보며 헛헛함에 마침표로 글을 끝내 마치지 못한다.

한 해 동안 우리는 수많은 쉼표와 마침표, 느낌표와 물음표를 던지며 살아왔다. 분주하고 어수선했던 삶을 하나둘 정리하며 한 해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간이 눈앞에 와 있다.

최혜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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