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나는 신간을 읽고 있는 때

입력
2023.01.06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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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눈이 내렸다. 오겠다고 했던 손님에게서 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눈이 오면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하다. 이런 날 누가 오겠나 싶어 종일 책이나 읽어야지 맘먹고 페이퍼백으로 나온 레이먼드 커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펼쳐 들었다. 중간쯤 읽고 있는데 동네 어른이 들어왔다.

은퇴 후 전원주택에 사는 그는 가끔 혼자 들러 커피를 마셨다. 10대 손주 생일선물로 책을 주고 싶다며, 책을 좀 읽는 아이이니 성인용 책으로 골라 달라고 했다. 이런 경우 좀 어렵다. 고민 끝에 '최재천의 공부'를 권했다. 그는 당신이 먼저 읽고 선물해야겠다며 최재천 교수와 대담한 안희경 작가에 대해 물었다.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는 프로필에 있는 대로 이야기를 했다. 촘스키, 지그문트 바우만, 리베카 솔닛, 마사 누스바움 등을 만나 대담집을 냈고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어렵겠네. 이젠 어려운 책은 못 읽겠어요. 젊어서는 어려운 책도 좀 읽었는데 이젠 싫어요. 나이 들어서 생각이 확고해지다 보니 아마 다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특히나 훈계하는 책은 정말 싫어요. 이렇게 살았다 하면 그만이지 뭘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가르치려 드는지.

그렇지요, 그렇지요. 나는 그 말들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지난가을 만난 한 선배가 생각났다.

이젠 다큐나 예술영화를 못 보겠어. 예능 방송 보면서 그냥 웃는 게 좋아. 조용한 게 싫어서 종일 TV를 켜놓기도 하고.

씨네큐브를 들락거렸던 그가 예능만 본다니, 예술의전당을 들락거리던 그가 아침에 일어나 잘 때까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지낸다니. 그의 나이 듦이 확 와닿던 북촌의 한 카페에서 나는 슬펐다. 하필 바람이 불어 은행잎은 사방으로 흩날리고 은행나무는 벌거벗겨지고 있었다.

나는 책방을 차린 후 공공연히 말했다. 내 꿈은 신간 읽는 할머니라고. 지금도 내 꿈은 여전하다. 돋보기 쓰고(지금도 돋보기는 쓰지만) 신간들을 검색하고, 그중 읽고 싶은 책들을 주문해 잔뜩 쌓아놓고, 그것들에 은근 중압감을 느끼며 읽다 책방에 손님이 오면 느리게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내려주며 최근 읽은 책들을 이야기하는.

문득 나는 70, 80이 된 나이에 이르러서도 지금처럼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싶어졌다. 지금처럼 밤마다 좋은 영화를 골라 보는 대신 예능을 틀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샷 추가를 외치며 종일 몇 잔의 커피를 들이마시던 때를 지나 하루 한 잔의 커피도 밤잠을 걱정하며 마시는 지금처럼 어쩌면 10년 후 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쩔쩔매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리고.

점심을 먹고 나는 과감히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아침에 먹었으니 또 한 잔을 마시면 밤잠을 설칠 수 있지만, 까짓것 한 잔 더 마시고 영화 한 편 더 보자 생각했다. 아직은 그래도 되는 때, 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나이 들면 지금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하고 싶어지지 않은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때, 하고 싶을 때 해야지. 커피를 마시는데 책방에 햇살이 들어왔다. 그새 날이 갠 것이다. 늙어 가는 일이야 혼자만의 일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나는 신간을 읽고 있는 때. 나는 커버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임후남 시인·생각을담는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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