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잃었던 '명예훈장'

입력
2023.01.3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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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에드워드 카터

피부색 때문에 사후인 1997년에야 명예훈장을 추서받은 하사 시절의 에드워드 카터. blackpast.org

피부색 때문에 사후인 1997년에야 명예훈장을 추서받은 하사 시절의 에드워드 카터. blackpast.org

TV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 스티븐 앰브로즈는 2차 대전을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최악의 인종주의자 히틀러 군대와 인종 분리-차별 군대로 싸운 전쟁”이라 정의한 바 있다. 흑인은 게으르고 무능하며 신뢰할 수 없으므로 전투병이 아닌 후방 지원병으로만 활용했고, 심지어 독일군 포로보다 열등하므로 포로 수송 열차에서도 독일군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전투병이 부족해지자 미국은 흑인 자원병에 한해 일괄적으로 이등병으로 강등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1941년 입대한 에드워드 카터 주니어(1916.5.26~1963.1.30) 하사도 제12기갑사단 기갑보병대 이병으로 45년 3월 라인강 서부 최전선에 배치됐다. 베를린 진공 작전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전차를 앞세운 정찰 진군 도중 그의 부대는 슈파이어(Speyer)라는 도시 외곽에서 88㎜ 야포와 바주카포, 기관총 진지 등을 갖추고 매복한 독일군과 맞닥뜨렸다. 카터는 적의 화력과 규모 등을 파악하기 위해 흑인 자원병 3명을 이끌고 들판을 가로질러 접근했고, 전투 도중 5발의 총상을 입으며 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 그들을 심문해 슈파이어의 독일군 진지 현황을 파악해 보고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선교사 아들로 LA에서 태어나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성장한 그는 상하이 사변 당시 만 15세 나이를 속이고 중국 국가혁명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싸웠고,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도 링컨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전사였다. 그는 슈파이어 전공으로 마땅히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MOH)을 받아야 했지만, 흑인이어서 퍼플하트 훈장과 수훈십자훈장을 받았고, 1949년 상사로 명예 제대했다. 스페인 내전 참전- 빨갱이 혐의로 재입대도 허락받지 못했다. 1940년 결혼해 아들 둘을 둔 그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만 47세에 폐암으로 숨졌고, 미국 정부는 1997년에야 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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