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한다더니 "개정 계획 없다" 철회

입력
2023.01.26 21:14
수정
2023.01.2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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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검토 과제 넣어 발표
법무부, 여가부 모두 "개정 계획 없다" 철회
5년 단위 정책 청사진 하루도 안 지나 번복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전직 여성가족부 장관 초청 간담회에서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전직 여성가족부 장관 초청 간담회에서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정부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검토한다는 내용을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담았다가 황급히 번복했다. 여당 지지층의 반발을 우려해 5년 단위의 정책 청사진을 발표 당일 수정하는 해프닝이 빚어진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26일 양성평등위원회를 개최해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의결했다고 밝혔는데, 여기엔 "형법 제297조의 강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 검토"라는 내용이 담겼다. 성폭력 관련 법률을 피해자 중심으로 다듬는다는 정책 과제의 일환이었다. 법무부와 여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점도 명시했다.

그런데 발표 직후 법무부가 먼저 선을 긋고 나섰다. 법무부는 기자단에 보낸 공지에서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 반대 취지의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며 "개정 계획이 없다"고 거리를 뒀다. 법무부는 개정에 반대했다는 뜻이다.

곧 이어 여가부도 비슷한 메시지를 내며 물러섰다. 여가부는 기본계획 발표 약 8시간 만에 "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에 포함된 비동의 간음죄 개정 검토와 관련하여 정부는 개정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공지했다. 여가부는 "동 과제는 2015년 1차 양성평등기본계획부터 포함되어 논의되어 온 과제로서 윤석열 정부에서 새로이 검토되거나 추진되는 과제가 아님을 알려드린다"며 '윤석열 정부'의 정책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26일 정부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자 올린 페이스북 글. '비동간'은 비동의 강간죄의 준말로 보인다. 페이스북 캡쳐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26일 정부가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자 올린 페이스북 글. '비동간'은 비동의 강간죄의 준말로 보인다. 페이스북 캡쳐


비동의 강간죄 신설 검토 '번복'은 여당의 핵심 지지층인 2030세대 남성들의 반발을 고려한 결정으로 분석된다. 여당에서는 지난 대선 기간에도 과잉처벌이나 무고 피해자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비동의 강간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분출됐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뭐? 비동간?(비동의 강간의 준말)"이라며 정부가 발표한 정책을 꼬집었다.

정부의 이 같은 '해프닝'으로 비동의 강간죄 입법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됐다. 현행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간죄로 처벌하려면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하는데, 법조계에선 이 폭행, 협박이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 결과적으로 공포에 질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으면 강간죄로 처벌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강간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게 만드는 대표적인 장벽으로 꼽혔다.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면 이런 허점을 막을 수 있다. 이 때문에 2018년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구성요건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고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이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했다. 국내에선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8년 1심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뒤 입법 논의에 불이 붙었지만 끝내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 여성폭력방지정책 기본계획에서 '비동의 강간죄 신설 필요성 검토'를 정책 과제로 꼽았었다.

홍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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